크리스 마스 선물
언제부터인지 내게는 꿈이 사라졌다.
다섯 아이들 키우며
열심히 그리고 바쁘게 살 때는 몰랐는데
아이들이 하나 둘 성장해서 집을 떠나며
살아가는 모든 일이 시들해졌고
따라서 하고 싶은 일,
갖고 싶은 것들이 하나 둘씩 내 곁을 떠나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꼽으라면
글 쓰고 사진 찍는 일,
그리고 축구 정도인데
뭐 세상에 대놓고 잘 한다고
외칠 수 있는 정도도 아닌데다가
나이 먹으면서 체력적인 면도 점점 시들해져서
그런 일들도 다 귀찮아지기 시작한다.
그러니 하고 싶은 일,
갖고 싶은 것도 다 없어진 것이다.
올 초까지만 해도
좋은 카메라 렌즈 하나 갖고 싶긴 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내가 그리 사진에 대한 감성이나 기술이 뛰어나지도 않을 뿐더러
좋은 렌즈 하나 더 장만한다고 해서
더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열정도,
소질 또한 없음을 알고
다 포기했다.
지금 있는 걸로도 내 주제에는 차고 넘치는 것이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
하고 싶은 일 ,
갖고 싶은 것들을
지금까지 부족함 없이 하고 소유한 것 같다.
하기야 사람이 변변치 못하니
꿈도 야무지지 않고,
소망도 영 부실하다는 사실이
내가 원하는 것이 없음에
좋은 구실 하나를 제공하는 것도 사실이다.
크리스 마스 때 선물 하나씩을 교환하는 전통이
우리 식구에게 있는데
올해는 첫 번 째 소망 리스트에 적어 넣을 거리를
영 찾지 못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가
아내의 도움을 받아 마지 못해 적어 넣었다.
소망 리스트 5나 6 쯤 되는 곳에(눈에 잘 띄지 않음)
장난 삼아 람보기니와 벤즈 S 600을 적어 넣긴 했는데
누가 보기는 보았는지 의심스럽다.
그런데 드디어 꼭 갖고 싶은 선물을 찾았다.
바로 어제였다.
어제는 큰 사위 회사의 연말 파티와 시상식이 있는 날이어서
오후 네 시부터 밤 11 시까지
손주들을 보아 주기로 예정이 되어 있었고
아내와 나는 기쁜 마음으로
손주들과의 시간을 기대하며
큰 딸네 집으로 향했다.
아내는 손녀 Sadie와 함께 놀 재료로
색종이도 장만했다.
아이들 놀이방에 있는 장난감 부엌에서
Sadie에게 커피 한 잔을 주문해서
커피를 마시는 일로 손주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색종이를 오려서 고리를 만들고
그것을 다시 연결해
크리스 마스 트리에 옮겨 다는 일에
Sadie는 흥미를 갖고 열중했다.
색종이로 나비와 부채를 만들어
현관문에 스카치 테이프로 장식을 하고
사진도 찍었다.
Sadie가 할머니와 색종이를 가지고 노는 동안
나는 손자 Desi와 놀았다.
비행기를 태워 주기도 하고
전화기 속의 사진을 보여 주면서 시간을 보냈는데
가끔씩 '하부지'하고 나를 부르는데
뼈가 녹을 정도로 그 한 마디가
나를 기쁘게 했다.
세상에서 내가 가장 감동적으로 들리는 언어를 꼽으라면
서슴없이 손주들 입에서 나오는
'하부지'라고 할 것이다.
'하부지'로서 손주들과 함께 지낸
아주 결정적인 시간은
아무래도 손주 둘을 등에 태우고
내가 말이 되어 내가 마루를 기는
말타기 순서였다.
아이들은 환호했고
그 소리에 비례해서 말의 속력도 증가했다.
숨도 가쁘고 힘이 들긴 했어도
아이들이 즐거워 하는 모습에
세상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커다란 기쁨을 맛 보았다.
그런데 카펫이 깔려 있지 않은
마루바닥을 기는 일은
무릎에 심한 고통을 수반하는 일이어서
오래 지속할 수 없었다.
말타기를 그만 두어야 하는 것은
손주들보다 내가 아쉬움이 더 했다.
그 때 생각난 것이
Knee Cap(무릎 보호대)이었다.
무릎 보호대만 있으면 나는 꽤 긴 시간
손주들의 말이 되어
그 아이들을 위해 봉사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무릎 보호대'
좋은 축구화가 내게 주어진다 해도
축구를 더 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좋은 렌즈가 내 손에 주어져도
걸작을 찍을 재주도 없고,
성능이 좋은 노트 북이
내 무릎 위에 놓여진다 한들
세상을 감동시킬 글 한 줄 쓸 능력이 없는 내게
무릎 보호대만 주어진다면 앞으로 몇 년 동안은
세상에서 가장 좋은 '하부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하고 싶고,
되고 싶은 것이 생겼으니
당연히 갖고 싶은 것도 생겼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기쁘고 가슴이 뛴다.
울지 않고
툴툴거리지도 않고
착한 사람이 될 터이니
싼타 할아버지는
같은 할아버지의 마음을 읽고
크리스 마스 이브에 내 머리 맡에
무릎 보호대 하나 슬쩍 갖다 놓으시면 얼마나 좋을까?
http://blog.daum.net/hakseonkim1561/18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