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와 무소유
법정 스님의 '무소유'라는 글에 보면
무소유란 아무 것도 소유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지니지 않는 것이라는 대목이 있다.
그런데 내가 요즈음 과다 소유에서 오는
마음의 불편함을 겪고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커피 때문이다.
내가 아침에 세탁소 문을 열고 들어가
불을 켠 뒤
컴퓨터를 켜고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커피 머신의 스위치를 올리는 일이다.
그만큼 아침에 마시는 커피는
(아는 사람은 알 터이지만)
설명할 수 없는 맛을 제공함으로써
세상에 살아 있음을 절로 감사하게 만들어 줄 정도이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고민이 생겼다.
커피 한 박스를 사다 논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또 한 박스의 커피를 아내가 사 온 것이다.
물론 커피 좋아하는 남편의 심중을 헤아리고 한
아주 갸륵한 마음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나
뜻 밖의 고민 거리도 동시에 따라온 것이다.
기존의 커피와 새로 들어온 커피는
서로 다른 브랜드인데
먼저 마시던 커피의 맛이 단조롭고 평범한데 비해
새로 사 온 커피에서는 신 맛이 조금 더 나는 것 같다.
그래서 아침마다 고민이 시작되었다.
어느 걸 마실까?
아님 어느걸 먼저 마시고
나중에 다른 걸 마실까?
고민 같지도 않은 고민이지만
쉐익스피어의 희곡 중 햄릿이 했던
'To be, or not to be'에 버금가는
심각하고 빼 놓을 수 없는
고민거리가 아침마다 하나 더 는 것이다.
모든 번뇌의 원인이 분별심에서 온다고 한다.
뭘 마실까?
어느 걸 먼저 마실까?
여러 개를 소유하는 것은
어는 것이 더 좋고,
어느 것이 더 못 하다는 분별심을 낳고
그 분별심이 번뇌망상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커피의 가짓수가 두 개로 늘어난 덕에
뜻하지 않게 분별심이 생겨
행복해야 할 아침의 커피 시간이 번뇌로 시작하게 되었다.
그래서 번뇌를 없애기 위해
'커피 한 박스를 누구에게 줄까?'하고
생각도 해 보았지만 아까워서 포기했다.
돈을 주면 주었지
커피는 줄 수가 없을 만큼 커피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두 가지 커피를 한 데 섞어서
눈을 감고 손에 잡히는 것으로 마시기로 했다.
내가 생각해 낸 것이지만
참 기발하고 희안한 발상인 것 같아
혼자 쾌재를 불렀다.
누구에게 줄 것도 없이
내 혼자 두 종류 커피를 다 맛 보면서
번뇌망상도 사라졌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런 꼼수를 쓰면서
무소유니 번뇌망상을 입에 올리는 나를 보며
법정 스님은 뭐라 하실까를
가만 생각하니 다시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러니 오늘 아침 커피 맛이 쓰기만 하다.
이번 주는 세탁소의 적자가 날 것은 거의 확실하다.
크리스 마스 를 맞아 선물이나
고향에 가느라 서민들의 주머니가 헐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직원들에게는 마음이 담긴 카드 한 장과 함께
아주 적지만 보너스를 봉투에 넣어 전달해야 겠다.
봉투를 여는 순간 직원들이
커피 향을 맡을 수 있을까?
내일 아침 커피 맛이 아주 황홀하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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