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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Pienza 일기

Pienza 일기 - 친구, 아니면 공범자

Pienza 일기 - 친구, 아니면 공범자

어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집 바로 옆 공터에서 축구를 했다.

우리 손자와 큰 손녀보다는 한 두 살씩은 더 먹어 보이는

오누이가 공을 가지고 놀고 있는데

나도 슬그머니 끼어서 놀았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서 많이 답답했지만

몸짓발짓으로 대충 의사소통을 하고

공을 통해서 둥글게 화합하며 땀을 흘렸다.

잠시 바람 빠진 공을 차다가

둘이서 의논을 하더니 자기를 소개했다.

남자아이는 알뚜르, 누나로 보이는 여자 아이는 나냐라고 했다.

 

내 앞에서 둘은 자기들이 가진 묘기(?)를 뽐내며

바람 빠진 공을 찼다.

나도 땀이 날 정도로 열심히 공을 찼다.

워낙 바람이 많이 빠진 공이어서 제대로 실력 발휘를 할 수 없었다.

 

한 시간쯤 땀을 흘렸을까,

아이들의 엄마가 아이들을 찾으러 왔다.

점심 먹을 시간이 된 것이다.

알뚜르는 엄마에게 조금 더 놀다 가겠다고 떼를 쓰는 것 같았다.

나의 어린 시절이 생각나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아이들이 다 흩어지고 나서

제일 나중까지 남는 사람이 나였다.

 

내가 점심을 잘 먹어야 힘이 나서 또 놀 수 있다고 설득을 해서

아이들을 엄마와 함께 집으로 보냈다.

두 아이의 부모는 우리 집에서 50 미터 정도의 거리에 있다.

관광객들의 물결이 흐르는 메인 스트릿에서 치즈와 와인을 파는 가게에서

엄마와 아빠가 일을 하는데 그 위층에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점심 먹으러 가는 아이들에게

점심 먹고 오면 우리 테라스를 통해 나를 부르라고 했다.

아이들은 신이 난 것 같았다.

둘이서 놀다가 한 사람이 더 놀이에 참가하니 노는 재미가 더한 것처럼 느껴졌다.

 

한 시간쯤 지나서 아이들이 '존', '존'하며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아이들과 이 약속도 있고 해서

지체 없이 아이들에게 달려갔다.

 

아이들은 오전에 차고 놀던 바람 빠진 공을 버리고

새 공을 가지고 왔다.

새로운 친구도 왔으니 친구를 대접하는 마음으로

새 공을 구해서 온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축구공도 아니고 고무공인데

바람이 빵빵하게 들어가서 탄력이 여간 좋은 게 아니었다.

그래서 아이들이 조금 공을 세게 차면

주변의 집의 창문을 때리게 되니

이웃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기 때문이다.

아니면 집 앞에 놓인  꽃나무 화분에 화분에 공이 떨어지면

꽃이 떨어지거나 손상을 입기 때문이다.

그런 일이 생기면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검지를 입술에 대고 쉬쉬를 하며 서로 조심하고 비밀을 지킬 것을

암묵적으로 합의를 했다.

 

그런데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다.

알뚜르가 찬 공이 공중으로 높이 솟았다가

화분의 장미 나무에 정통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꽃 한 송이가 바닥에 떨어졌고,

장미 가지 하나가 아래쪽으로 푹 가라앉아 버리고 만 것이다.

 

나는 얼른 꽃송이를 집어 화분 안으로 옮기고

장미 가지를 다시 세워 원래 있던 위치로 옮겨 놓았다.

그리고 다시 손가락을 입술에 대며 쉿 하는 소리를 내며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뭔가 심상치 않은 표졍이 아이들의 얼굴에 서렸다.

아이들이 공을 가지고 이리저리 살피며

자기들끼리 뭐라고 뭐라고 하며 근심스러운 말을 교환하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공을 건네받아 살펴보니

공이 장미 나무에 떨어지며 가시에 찔려 구멍이 나서 바람이 새고 있었다.

아이들의 마음도

내 마음도 바람이 빠졌다.

 

낭패를 본 것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내가 공을 찬 것이 아니니

내 첵임은 아니지만

내 손주같이 귀여운 아이들을 위해

내가 새 공을 사주겠다고 하며 아이들을 안심시켰다.

그래서 지갑을 가지고 아이들을 앞세워 공을 사러 갔다.

공을 파는 곳은 동네 초입의 만물상이었다.

걸음도 잘 못 걷는 영감님 혼자 가게를 운영하는 곳이다.

 

새 공을 하나 사고

아이들에게 젤라토도 하나씩 선물했다.

 

이렇게 나는 알뚜루와 나냐는 내 친구가 되었다.

이웃의 장미 나무에 상처를 입힌 비밀은

우리끼리만 공유할 것이다.

우리 셋은 친구일까,

아니면 공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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