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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구닥다리의 넋두리

구닥다리란 말이 있다.



국어사전은 구닥다리의 뜻을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여러 해 묵어 낡고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 사물, 생각 따위를 낮잡아 이르는 말.'



눈을 감고 곰곰 생각해 보니 내가 바로 이 구닥다리 범주에 속하는 것 같다.

사람됨이 그렇고 내가 가지고 있는 소유물이 그렇고,

아마도 내 생각도 그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 같다.
환갑을 지났으니 육신이 구닥다리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모든 신체 기능이 젊은이들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고

옷이나 신발 등등도 새로운 감각에 훨씬 뒤질 뿐 아니라

새것을 구입하려는 생각도 거의 없다.



자연 아이들이 집을 떠나며 두고 간 옷들 이내 차지가 된다.
오죽하면 둘째 딸아이가 20 년 전에 입었던 노란 fleece shirts를 내가 요사이도 입고 있을까?
그래서인지 몇해 전 크리스마스에는

나를 짝으로 뽑은 둘째 딸이 베이지 색 플리스 셔츠를 선물했다.

20 년 전 둘째가 입었던 사진과 올해 내가 입었던 사진을

비교해서 프린트한 종이까지 첨부해서 말이다.



그런데 둘째 딸아이가 선물한 것은 셔츠뿐이 아니었다.
커피 한 봉지와 함께 fresh mint를 곁들인 것도 내게 주었다.

그것은 나와 아내가 미국 횡단 여행의 목적지인 산타 모니카에 도착해서

아이들과 만났을 때 아이들이 건네준 바로 그 커피였다.

여행 끝에 마신 민트가 들어간 바로 그 커피는

여행의 피로를 날려 버리고 영혼까지 맑게 만들어 주었다.

커피 선물은 산타 모니카에서 의식 구들과의 민트 같이 산뜻한 만남의 기억을 되살려 주었다.



그리고 선물 중에는 작은 라디오와 함께

둘째가 동네를 다니며 사 모은 LP 판 몇 장이 있었는데

그중에는 20 세기 소프라노 가수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졌다고 하는

이탈리아 출신의 Tebaldi가 부른 푸치니의 '라보엠'도 무심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아마 둘째는 'Tebaldi'라는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러니 그 LP판이 가지고 있는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고

아빠가 좋아하는 'La Bohem'이라는 제목만 보고

문제의 LP 판을 선뜻 집어 들었을 것이다.

게다가 딸아이가 지불한 금액은 모르긴 몰라도 2 달러를 넘기지 않았음을 확신한다.
단 돈 2 달러에 Tebaldi가 부르는'내 이름은 미미' 같은 아름다운 아리아를 들을 수 있음은

얼마나 큰 기쁨인지 모른다.
기술과 인터넷의 발달로

점점 더 좋은 음질의 음악을 언제 어는 곳에서나 아주 쉽게 들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Tebaldi와 같은 소프라노를 LP 판으로 들을 수 있는 것은 디지털 문명이 줄 수 없는

아날로그의 따뜻한 행복을 내게 선사한다.



LP판으로 음악을 듣는 것은

일종의 구닥다리의 행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구닥다리 안에는 디지털의 계산적이고 똑 부러지는 직선이 아닌 부드러운 곡선의 미학이 있다.

그리고 구닥다리의 소중함과 위대함이 있다.



오래되고 지나간 것이 구닥다리여서 불편하고 볼품이 없을지 몰라도

돈으로 살 수 없는 가치가 있다고 난 생각한다.
둘째 딸이 내게 준 선물 엔지 나간 시간에 대한 소중함과 추억이 깃들어 있다.

사려가 깊은 둘째 딸아이는 아빠에게 지나간 것들의 추억을 선물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미 구닥다리가 된 아빠에게 구닥다리 선물을 했지만

분명 거기엔 구닥다리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깃들어 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난 시간이 지나 나이테처럼 쌓이는 켜를 사랑한다.



이문재 시인의 '푸른곰팡이'라는 시를 처음 읽었을 때의 감격을 나는 잊지 못한다.



'발효의 시간'



시간이 지나면서 썩는 것이 있고 발효되는 것이 있다.
발효되어서 맛이 깊어지고 향이 진해지는 것들이 있다.
김치가 그렇고 된장이며 간장이 그렇고 포도주가 그러하다.
시간이 쌓여 깊어지고 짙어지는 맛이 어떤 구닥다리 안에는 존재한다.

오늘 저녁 벼르고 있던 Tebaldi와 만날 생각을 하니

내 구닥다리 심장이 팔딱팔딱 뛰기 시작한다.



오늘 저녁엔 구닥다리인 내 가구닥 다리 LP 판으로 음악을 들으며 와인 한 잔 마시려고 한다.

옷도 신발도 용모까지도

그저 구닥다리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내 마음과 정신만은

향기 나는 구닥다리로 익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



주책맞은 구닥다리가 넋두리 한 번 해 보았다.

구닥다리도 넋두리할 자유는 있지 아니한가?


https://blog.daum.net/hakseonkim1561/1877#none

 

 

 

 

둘째가 1998 년에 입었던 노란 Fleece를

2017 년에 내가 입고 있다.

 

 

 

 

새로 선물 받은 베이지 색 fleece

 

 

 

 

 

캘리포니아 산타 모니카에서

아이들에 내 손에 건넨 민트가 들어간 바로 그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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