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저녁 나도 드디어 멘붕이라는 걸 경험했다.
큰 딸에게 받은 생일 선물 때문이었다.
사실은 어제가 큰 딸의 출산 예정일이었다.
아직 아이가 나올 생각을 안 하고 있으니 궁금하던 차에
마침 집에 다니러 온
둘째에게 언니에게 전화를 해보라고 했다.
전화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들어보니
"I'm pretty bored."라고 하는 것 같았다.
자유분방한 성질에
꼼짝 못하고 집에 들어앉아 있으려니
좀이 쑤실 법도 하지.
그래서 딸의 얼굴도 볼 겸,
큰 딸 집에 가기로 했다.
사실은 단풍 구경 가기로 했는데
어쩔 수 있나.
포트리에서 순두부를 주문해서
소영이 집으로 갔다.
식사 후 집에 오려는데
소영이가 내 생일에 함께 하지 못할 거라고 하며
카드와 함께 작은 박스를 하나 내밀었다.
풀어보라는 소영이 말에
"기다렸다 아빠 생일에 풀어 볼게.
그동안 기대하는 마음으로 행복할 수 있으니까."
라고 대답했다.
집에 돌아와서 보니
선물이 무언지 궁금한 건 나보다도
아내였다.
아내의 호기심을 이길 수는 없는 노릇.
박스를 싼 포장지를 뜯고 보니
대박!!!!!!!
대박 사건이었다.
EF 28 105 mm F4 렌즈였다.
그것도 렌즈 주위에
빨간 테두리가 있는 -----
이 렌즈 하나만 있으면
어딜 가나 대부분의 경우를 다 커버할 수 있어서
여간 편리한 게 아니었다.
평소에도 하나 장만했으면 하는,
그런 꿈의 렌즈였기에
기쁨은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보통 웬만한 일에는
돌부처 같이 꿈쩍도 않는 내게도
소위 멘붕이라는 것이 왔다.
정신이 아득한 것이
무엇이 무엇인지 분간 못하는 상태가
잠시 지속되었다.
렌즈 앞에 빨간 테두리가 있는 것이면
그 렌즈 값은 일단 천 달러가 넘는다.
천 달러가 넘는다면 나에게도
적지 않은 부담이 되는데 딸에게는 오죽 부담이 되었으랴.
잠시 후에 정신이 들면서
한 편으로는 놀랍고 기쁘면서도
또 한 편으로는 마음이 아렸다.
"무슨 돈이 있어서 이런 비싼 선물을 했을까?"
떨리는 마음을 진정하며
박스를 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보통 렌즈의 무게보다 가볍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렌즈 앞부분의 모양이
보통 렌즈와는 달랐다.
다시 박스를 들고
이리저리 둘러보니
그것은 렌즈가 아니고
카메라 렌즈와 아주 흡사하게 만든
커피를 담는 보온 머그였다.
헐!!!!!!!!!!
실망도 되었지만
그보다 안심이 되었다.
딸아이가 큰돈을 쓰지 않은 것이 기뻤다.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는 경향이 있는데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처음부터 찬찬히 박스를 살펴보았으면
멘붕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커피 머그가 날 속이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더더군다나 딸아이가 아빠를 놀리려고 했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내 눈이, 내 마음이
이 모든 해프닝의 주인공인 것이다.
아빠가 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 걸 아는 딸아이가
많이 생각하고 고른 선물을
아빠라는 사람은 그걸 가지고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커피 머그와 진짜 카메라 렌즈 사이엔
아주 먼 거리가 존재한다.
가격이 다르고 용도가 다르다.
커피 머그를 카메라 렌즈로 사용할 수 없듯이
진짜 카메라 렌즈로는 커피를 담아 마실 수가 없는 법이다.
커피 머그는 머그대로
소중한 용도가 있음에도
렌즈가 아니라는 이유로
무시당하고 차별받는 경우가 적지 않을 것이다.
우리 큰 딸 소영이가 그랬다.
모든 면에서
뛰어난 능력을 가졌던 딸아이에게
아빠는 카메라 렌즈를 기대했었다.
커피 머그에 커피 한 잔이면
행복할 수 있는 딸아이에게
그런 싼 머그가 아니라
비싼 렌즈만을 기대했던 적이 있었다.
카메라 렌즈와 커피 머그 사이의
차이를 인정하지 못할 때
둘 사이의 골엔 아픔만이 존재한다.
그래도 이제나마
커피 머그를 아빠의 생일 선물로
고르며 아빠가 기뻐하길 바라는
딸아이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내일 아침엔
소영이가 선물한 커피 머그에
커피를 담아 출근길에 마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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