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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구들 이야기

살 맛

 

 

 

 

지난 두 주 동안 집에 들어오질 못했다.

한국에 다녀 오느라 집을 비울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한국으로 떠난 2 주전만 해도

나뭇잎에 막 붉은 물이 들려던 참이었다.

 

간간히 나뭇잎이 떨어지기 했어도

잔디 밭을 뒤덮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두 주일이란 기간 동안

가을이 꽤 깊어진 모양이다.

 

지난 토요일,

밤이 이슥해서 우리 집이 있는 Higgins Place로 들어서니

집집마다 잔디밭 가장자리에

낙엽이 쌓여 있는 것이

자동차 의 불빛을 통해 보였다.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우리집만 엉망으로 잔디 위에 낙엽이 뒹굴 것은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그런데 집에 도착해보니

웬일인지 우리집의 낙엽도

잔디밭과 도로 사이에

아주 얌전히 쌓여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 참)

 

어두운 집에 들어와 불을 켜고 식탁 위를 보니

인덱스 카드에  쓰여진

메모가 한 장 눈에 띄었다.

 

둘째 지영이가 우리 없는 사이에

집에 다녀간 모양이었다.

약혼자인 Brian이 중국에 다녀오면서

선물로 사온 스카프 두 장과 함께

남겨 놓은 메모.

 

철자법도 표현력도 엉망이지만

딸 아이의 어여쁜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집에 왔다가 낙엽이 잔디밭에 딩구는 걸 보고는

그냥 돌아서지 않고

치워놓고 간 것이다.

 

내가 하기 싫어하는 정원 일 중 으뜸이

바로 낙엽 치우는 일이다.

치우고 돌아서면 또 한 무더기가 떨어지고----- 

 

그렇게 끝이 없이 해야 하는 일이 바로 낙엽 치우는 일이다.

 

그런 아빠의 마음을 아는 지영이가

집에 온 김에 낙엽을 치워 놓고 간 것이었다.

 

한국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시차를 바꿀 여유도 없이

일을 해야 했던

아빠의 마음을 헤아린 지영이의 소행임이 밝혀졌다.

 

Brian이 아내 것으로는 중국산 실크 스카프를,

내 몫으로는 Hermes 스카프를 사왔는데

Brian에겐 미안하지만

스카프 선물보다도

지영이가 남기고 간 메모가 더 귀한 선물이 되었다.

 

부엌의 불을 끈 후에도

식탁 위의 흰 메모지는 어둠 속에서

반딧불이를 한 군데 모아 놓은 것 같이

은은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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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나는 지영이에게 이렇게 답했다.

 

"아빠는 네가 정말로 밉다.

아빠가 좋아서 하는 일을

어쩌면 아빠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그렇게 홀라당 혼자 해치우는 법이 어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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