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득 (어거스틴) 신부님과의 인연 I
나와 박 신부님과의 첫 인연은 아마도 1989년으로 시간을 돌려야 할 것 같다.
이민 6년 차였던 그 당시 나는 야채가게에서 매니저로 일을 했다.
평일에 하루 쉬고 주일에는 일을 해야 했으므로 성당에는 거의 갈 수가 없었다.
그때까지 신앙생활에 목을 맬 정도로 열성적인 신자로 살아온 것도 아니고 해서
성당에 가야 한다는 열망 같은 것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그 해 봄쯤 해서 내 몸에 중대한 문제가 생겼다.
정신은 녹조가 가득 낀 어항처럼 혼탁했고,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서 마치 마치 문어나 낙지같이 흐느적거렸다.
어느 때는 5 파운드 정도밖에 되지 않는 작은 종이 박스를 떨어뜨릴 정도였다.
의사 선생님을 찾아갔더니 몸에는 별 이상이 없다는 소견을 듣고 하릴없이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렇게 몸이 아픈데 아무런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으니 절망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큰 일이다 싶어서 한국의 부모님께 연락을 해 보니
내 건강보험이 그때까지도 살아 있다고 해서 한국으로 가 정밀 진단을 받으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런 혼돈 속에서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티고 있던 어느 날,
장모님께서 뉴저지 오렌지 성당에서 치유의 예절이 있다는 소식을 전해주셔서,
어찌어찌해서 그날은 일요일임에도 일을 하지 않고 뉴저지 오렌지 성당으로 갔다.
어릴 적부터 성당에 다녔지만 교회 안에서
종교 예절을 통해 병고침의 은혜를 받았다는 건 듣도 보도 못했다.
일부 사이비 개신교 종파에서 그런 기적(?)을 체험하라는 광고를 했지만
나는 무당의 푸닥거리나, 일종의 사기라는 생각을 굳건하게 가지고 있었다.
물론 오렌지 성당으로 향하는 나의 마음 가짐도 바로 그 지점에서 조금도 나아지지 못한 상태였다.
폭우가 쏟아진 뒤 비는 그쳤지만 부루클린에서 오렌지 성당으로 가던 길은
앞 차나 옆을 지나던 차가 물웅덩이를 지나며 사나운 물세례 때문에
어려움과 어려움의 점들이 선처럼 이어졌다.
오렌지성당에 도착하고 얼마 있지 않아서 치유의 예절이 시작되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이라고 삼십 평생 입으로 성호경을 외웠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성령에 대해 애끼 손가락만큼의 마음도 써 본 적이 없었다.
치유의 예절의 강사는, 내 기억이 맞다면, 아일린 조지 여사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분의 이끌림에 온몸과 마음을 맡기게 되었다.
그분이 공동으로 죄의 고백을 할 때에는 한 가지 한 대목의 죄가 모두 나에게 해당되었으며
나도 모르게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그 죄를 인정하고 참회를 하는데 이르렀다.
마치 언 땅이 녹고 그곳에 봄기운이 서려 보드랍게 흙이 바뀐 것 같이
내 마음에도 봄이 온 것 같았다.
치유의 예절이 끝난 뒤,
아일린 조지 여사가 "저 뒤에 오랫동안 무릎 때문에 고생하신 남자분, 오늘 치유되었습니다."라고 하자
우리와 같이 동행을 했던 아내 사촌언니의 남편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했다.
나는 놀랐다.
성당 안에서 기가 막힌 일들이 벌어졌다는 걸,
성령께서 계시며 우리 곁에서, 그리고 내 안에서 활동하고 있음을 그날 깨닫게 된 것이다.
그날 나는 여러 해 동안 게을리하고 미루어 두었던 고백 성사를 보았다.
나의 고백을 들어준 분이 바로 박창득 신부님이다.
어둡고 꽁꽁 얼었던 마음에 빛과 따스한 공기가 들어올 수 있도록
신부님은 감옥처럼 굳게 닫혔던 내 마음의 문의 빗장을 벗겨주셨다.
그렇게 신부님과의 첫 만남이 시작되었다.
내 몸과 마음, 그리고 신앙의 봄이 그때 그곳에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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