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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치지 못한 편지

부치지 못한 편지 (5)

병원은 성남인지 아니면 분당인가 (성남과 분당이 같은 곳?)하는 그 어딘가에 있었다.

미금역 (이 역 이름도 확실하지 않다)부근이라고 했는데 길을 지나며 보니 언덕 위에

흰 아크릴로 된 병원 간판이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저녁 일곱 시쯤 되었는데 벌써 어둠은 불빛이 닿지 않는 곳은 어김없이

빼곡이 채우고 있었다.

 

병원 입구의 데스크에서 아버지 계신 곳을 확인하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니 라운지 같은 곳에서

어머니와 작은 이모와 이모부, 그리고 외숙모가 우리를 반기셨다.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아버지가 운명을 달리하실까봐

속들을 끓이고 계셨음이 눈에 훤히 보였다.

우리를 만나자 자신들을 옥죄고 있던 책임의 사슬같은 것에서

풀려난 것처럼 자유로운 표정으로 바뀌셨다.

무거운 한숨 같은 것들을 폐부 깊은 곳으로부터 끌어올려

조심스레 밖으로 토해들 내셨는데

아마도 살아오면서 가장 깊이 쉰 숨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무거운 숨들을 내려 놓으셨다.

 

황망히 인사를 마치고 보니 30년 넘게 뵙지 못했던

작은 이모부와 외숙모의 얼굴이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 긴 시간의 공백이 전혀 느껴지질 않았다.

다만 내 머리가 그 분들보다 더 셌을 뿐이었다.

어쩌면 작은 이모부의 머리는 그렇게도 까만지,

염색을 하셔서 그런 것인가-이 질문은 미국으로 돌아올 때까지도 드리지 못했다.

머리색은 그렇다 치더라도 얼굴도 '전혀'라고는 할 수 없어도

세월의 변화를 느끼게 하질 못했다.

 

대학교 이학년 때인가 작은 이모부 댁에서

이모부와 정종을 마신 적이 있었다.

잘 못마시는 술인데

"어, 제법 마시네"하시는 작은 이모부의 꾀임에 빠져

권하시는 잔을 마다 않고 홀짝홀짝 들이켰다.

그 당시 소주에 비해서 정종은 입 안에 훨씬 부드럽게 흘러들었다.

몇 잔 마시면 취해서 더 마시지 못하는 소주와는 달리

정종은 '나도 제법 술좀 한다'는 젊은 치기와 허세를 채워줄 정도로 부드러웠다.

마신 잔의 수를 셀 수 없을 정도까지 마셨다.

처음의 은근한 부드러움과 달리

서서히 오르는 취기는 질기고 오래 갔다.

집에 돌아가 자리에 누울 때까지 내 몸을 가누기가 힘이 들었다.

육신을 가진 것이 그렇게 부담스럽다고 느낀 때가 그 때 말고 또 있었을까.

벗어버리고 싶은 육신

집에 돌아가는 길이 마냥 어둡고 길었던

젊은 날의 기억 한 조각이 눈 앞에 떠올랐다.

 

얼굴의 근심이 사라지면서 작은 이모부의 장난기 섞인

얼굴이 되살아났다.

작은 이모부와 한 잔 했던 기억은 있는데,

그런데,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다시 한 잔할 기약은 없었다.

 

가수 양희은 식으로 표현한다면

살아가는 일, 참 쓸쓸한 일인 것 같다.

 

많은 생각과 느낌들이 짧은 시간안에  스쳐지나갔다.

우리가 끌고 온 가방을 라운지 한 쪽에 밀어놓고

아버지를 뵈러갔다.

아버지는 라운지 바로 옆, 간호사들이 근무하고 있는  사무실에 딸린 부속실에 계셨다. 

원래 계시던 병실은 다섯 분이 함께 계시는데

상태가 위독하니 이 곳으로 옮기셨다고 했다.

 

아버지의 모습은 흡사 미이라 같았다.

올 이월말에 LA여동생 집에 가서 뵈었을 때만해도

좀 마르시긴했지만 그렇게까지 야위시진 않았다.

얼굴도 거의 알아봅 수가 없었다.

눈 밑엔 그림자처럼 붉은 빛과 갈색의 중간쯤되는 반점이

드리워져 있었는데 마치 팬더 곰의 눈이 연상되었다.

 

동생은 아버지를 뵙는 순간 울컥하며 울음이 터지려는 것 같았다.

재빨리 동생의 어깨에 내 손을 올리며 감정을 억제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가능하다면 아버지가 세상을 편안한 마음으로 떠나시길 원했기 때문이었다.

동생은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아버지의 마지막  길은, 그것이 얼마만한 시간이 될 지 몰라도

외롭지 않고 편한한 마음으로 함께 걷고 싶었다.

아버지도 그렇게 생각하실 것이라고 믿었다.

그것이 내가 생각해낸 아버지와의 이별법이었다.

몸은 고통스러우시더라도 마음만은 평화롭게 우리 곁을 떠나시게 하고 싶었다.

 

아버지를 처음 뵈면서 내가 한 것은 아버지의 손을 잡는 일이었다.

그것은 본능이었다. 평소에도 아버지의 손을 잡는 일은 거의 없었다.

손을 잡는 일, 그것은 서로의 체온을 나누는 행위다.

아버지와 아들, 세상의 누구보다도 가까워아 할

아버지의 손을 잡은 것이 언제였던가.

 

기억이,

기억이 없다.

 

내가 아버지의 손이 필요할 때

아버지는 늘 먼 곳에 계셨다.

군인이셨던 아버지는 늘 떠돌이 삶을 사셨다.

인제, 양구, 대구, 원주, 월남, 그리고 예편하신 이후론 춘천에 머무셨다.

따로 산 것이 같은 집에서 함께 산 기간보다 훨씬 길었다.

어릴 적 아버지가 집에 오실 때면 불편하고 어색한 손님 같았다.

어릴 적 아버지의 손은 늘 너무 멀고 어색했다. 

 

내가 군대를 다녀와서 결혼을 하고

미국으로 떠나오면서

이번엔 나의 손이 아버지의 손과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지게 되었다.

아버지가 내 손을 필요로 하실 때

나의 손은 태평양을 건너 지구를 반 바퀴 돌아야 잡을 수 있는 곳에 있었다.

 

살면서 멀기만 했던

아버지의 손과 아들의 손이

하필이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는 시간에야 만나다니

기막힌 삶의 아이러니가 아닌가.

 

아버지의 한 쪽 손은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는데

다른 한 손은 체온이 조금씩 식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버지, 저희 알아보시겠어요?"

아버지는 감았던 눈을 조금 뜨시더니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리고 오른 쪽 눈에서 눈물 몇 방울을 흘리셨다.

두 눈이 아닌 한 눈에서만 눈물이 나온다는 사실.

아버지는 말라가고 계신 것이었다.

물도 목으로 못 넘기시고 혈관으로 들어오는 액체에 의지해 삶을 이어오신 아버지.

양 쪽 팔뚝의 혈관 부근은 주사바늘 때문에 온통 멍이 들어 있었다.

멍이 든 아버지의 팔을 보며

푸른 색이 처절하게 슬픈 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신다는 것은

삶을 지탱해가고 있는 몸 속에 남아 있는수분의 얼마를 소비한다는 말과 같은 것.

 

아버지가 흘리신 몇 방울의 눈물이 안타까웠다.

아버지의 마지막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피폐한 육신에 비해 아버지의 의식은 또렷했다.

우리가 온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는 몇 번인가

시간을 물어보셨다고 한다.

말씀을 하실 기력이 없으시니 손목을 가리키며 시간을 물어보셨을 게다.

그리고 기다리셨을 것이다.

삶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기다림.

 

대체 자식이 무어라고 고통을 참고 기다리신단 말인가.

자식인 내 마음은 그렇게 절실하지 않은데도.

 

작은 소화기 같은 통에서  가느다란 호스가 나와

아버지의 코에 연결되어 있었다.

산소호흡기였다.

아버지는 산소호흡기 덕으로 삶을 조금 더 연장할 수 있었다.

사는 동안 자신에게 주어진 호흡의 할당량이 있다면

우리가 도착할 때까지 아끼고 아끼고 계셨을 것이다.

 

숨을 쉬는 것도 고통이 된다는 걸

아버지를 보며 깨달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들이마시고

내 쉬는

숨.

 

아버지는 가끔씩 무슨 말씀을 하려고

애를 쓰셨다.

그런데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두어 번 글을 쓰는 시늉을 하셔서

종이와 펜을 가져다 드렸다.

글을 쓰신다고 쓰셨는데

두 세 살짜리 아이가 펜을 잠은 것 같이

아무런 의미도 없는 낙서가 되고 말았다.

 

그 때는 몰랐는데

지금 이  순간엔 알 수 있다.

아버지가 그토록 우리에게 하시고 싶어했던 말씀을 .

 

그래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한 달이 다 되어가는 지금에서

가슴이 더 저리다.

 

그렇게 아버지의 지상에서 맞는

마지막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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