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치지 못한 편지 2
비행장에 도착해서 아내와 작별을 했다.
동생과 나는 오후 두 시 비행기.
아내는 아마도 밤 12시 30분 비행기로 우릴 뒤따를 것이다.
내가 인천에 도착하기 전,
아마도 얼마간 아내와 난 하늘 위에 함께 떠 있을 것이다.
긴 거리를 사이에 두고서 말이다.
거리, 공간.
살아가면서 때때로 느끼는 그 거리, 그 공간.
아버지와 나 사이에도 그런 것이 존재했을 것이다.
같은 하늘이라도 멀리 떨어진 그런 공간과 거리가.
라운지에서 커피와 함께 간단한 요기를 하고 비행기에 올랐다.
우리가 타고갈 비행기는 내 기억이 맞다면 A380이었다.
동생의 설명으로는 비행기가 이층으로 되어 있어서.
승객을 Boing 747의 거의 두 배 가량 태울 수 있다고 하는데
나같이 비행기 뜨고 내리는 것도 신기해하는 사람에겐
호기심에 눈을 크게 뜨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아닌게 아니라 같은 비행기를 타는데도 입구가 둘로 나뉘어져 있었다.
아래층 입구와 윗층의 입구가 달랐다.
'아버지와 아들인 나의 생각도 늘 이처럼 갈렸던 건 아닐까?'
내가 있는 공간의 비행기 모습만이 다인 것처럼 살아가는 나.
좁은 각도, 짧은 촛점 거리 - 내 시선이다.
내가 앉아 있던 아래 층엔 또 하나의 세상이 있는 것을--------
아버지가 이승과 저승의 갈림길에서 고통 받고 계시다는데도
새로운 볼거리가 생기니
아버지는 까맣게 잊고
볼거리가 은밀히 던지는 추파를 견디지 못하는 것이
나라는 인간이다.
하기야 불구경, 싸움구경 하느라
학교 다니면서 강의를 빼먹은 적이 어디 한 두번이라야 말이지.
곁에 있던 다른 비행기들보다 키도, 몸체도
우리가 타고 갈 A 380이 훨씬 더 큰 것이 뚜렷하게 보였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생각해보니 아버지는
A 380보다도 훨씬 더 크신 존재였다.
아버지 살아 생전엔 나이가 들어도 철은 들지 않고,
부족하기 짝이 없는
나같은 자식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았던----------
비행기에 앉아서 동생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동생이라고 해야 나이가 아홈살 차이가 나니
자라면서 같이 시간을 보낸 적이 별로 없다.
게다가 차가운 성격인 내가 동생들에게 살갑게 대해주었을 리가 없다.
보이는 것만 보고
무릎을 꿇고 눈을 맞춰
어린 동생을 바라보지 못했던 나.
아, 나라는 사람.
동생이 불쑥 이런 말을 했다.
"이젠 형하고 같이 여행할 일도 별로 없겠어."
올 2월 말에 LA에 있는 여동생집에
부모님을 뵈러 동생하고 같이 다녀온 적이 있다.
동생은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그 때 참 좋았었는데-----"
하고 말꼬리를 흐렸다.
동생의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우린 2월 말 밤 늦게 LA 공항에 도착해서
호텔에 짐을 놓고 한 잔할 곳을 찾아
변두리의 밤거리를 헤맸었다.
결국 마땅한 곳을 찾지 못하고
호텔방에서 맥도날드 햄버거로 허기를 달래고
편의점에서 사 온 맥주로 한 잔 했다.
그 하찮은 일도 동생에겐 소중했었나 보다.
아무런 것도 아닌 것이 소중한 추억으로 남는 관계.- 아, 그것이 가족이라는 것이다.
밋밋하기만 했던 동생이 갑자기 소중한 존재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동생과 둘만의 여행도 부모님이 계셔서 가능했었다.
아버지 임종을 맞으러 가는 이 여행이 끝나면,
언제나 또 다시 둘만의 여행이 가능할까?
마지막, 마지막,
마지막-------
이젠 '마지막'이란 말이 슬퍼지는 나이가 된 것이다.
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 때까지는 비교적 담담했었는데,
동생이 그 말을 꺼내자 비로소
팍팍하게 마른 가슴 속에 싸한 슬픔 같은 것이 밀려 들어왔다.
아버지의 죽음이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어둔 밤바다의 파도 소리 같기도 하고,
가을의 밤꽃 냄새 같이 싸하던 그 기분.
비로소 아버지라는 존재가 이 지상에서
소멸해가고 있음이 늦가을의 바람처럼 내 피부에 와닿았다.
아버지는 우산 같은 존재다.
죽음이라는 비로부터 나를 가려주는 그런 존재.
때론 빗물이 튀어 조금 젖은적도 있었겠지만
우산 덕에 흠뻑 젖은 적은 없었다.
가족 중에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저 세상으로 떠나보냈지만
그건 내가 어리고, 젊었던 날의 이야기다.
슬펐지만 죽음을 느끼진 못했다.
이제부턴 내가 우산이 되어
쏟아지는 비를 맨 몸으로 맞아야 한다.
텅 빈 우주에서 홀로 유영하는
우주인의 외로움이 이러할까?
갑자기 비에 젖은 것 같이
으스스해짐을 느꼈다.
비행기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 속을 날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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