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에서 나오며 동생이 아버지가 계신 병원으로 전화를 했다.
작은 이모가 받으셨는데 무조건 '빨리 오라'고 하셨다.
마음이 바빠졌다.
이젠 어쩔 수 없이 아버지의 죽음과 마주해야 하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시간, 그놈 참'
택시를 타고 동생이 행선지를 말했더니
기사는 잘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보바스 병원'이라고 동생이 말하는 순간
뜬금없이 웃음이 터져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슬프고 심각해야할 상황에서
어설프게도 이상 시인투의 말장난이 생각나는 것이었다.
보바를 거꾸로 하면 바보, 게다가 '스'는 영어의 복수형 's'
'바보들의 병원'으로 우리는 가야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병원에 도착해서 보니 'Bobath Memorial Hospital'이 정식 병원 이름이었다.
말도 안 되는 것을 속으로 이리 만지고 저리 뜯어보며
살아온 나의 삶.
어릴 적부터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많이 했다.
말 그대로 텅 빈 생각, 공상들로 이루어진 나의 삶, 시간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사실 난 아버지가 입원해 계신 병원 이름도 모르고
무턱대고 동생만 의지해서 길을 따라나섰다.
그래도 그런 건 아무래도 괜찮았다.
정말 문제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아버지와의 이별을 맞아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자식으로 잘해드린 것 한 가지도 없는 내가
세상과 이별하시는 아버지께
배웅만은 아주 잘 하고 싶었다.
평소에는 공부를 안 하다가
벼락치기로 공부해서는 좋은 결과나 바라는 그런 심뽀다.
힘겹게 세상을 사시다가 고통 속에
이승에서 저승으로
떠날 시간을 기다리며
마지막 남은 몇 번의 숨을 고르고 계실
아버지도 따지고 보면 바보가 아닌가.
죽 한 숟가락, 물 한 모금 삼키지 못하지 못하는 고통 속에서도
찾아오는 자식도 없이 외롭게 견디시는
아버지는 분명 바보가 맞을 것이다.
자식 셋 다 모두 미국으로 떠나보내고
명절 때면 외로우셨다는 아버지.
머나먼 이국 땅으로 살러가는 자식들의 소매를
아버지는 수십 번은 잡아 당기셨을 것이다.
그러나 입으로는 한 말씀도 없으셨던 아버지.
말씀이 없으셔서 더 외롭고 아프셨을 아버지.
그 때는 내 가야할 앞길이 바빠서
등 뒤에 남겨진 아버지의 마음을 볼 수 없었다.
아, 바보같은 세상의 아버지, 아버지들.
내가 아버지가 되어서야
비로소 알 것 같다.
뒤에 남겨지는 아버지의 마음을--------
그리고자식 때문에
세상의 부모들은 다 바보가 된다는 걸.
머리에 흰 서리가 내리고 나서야,
그리고 임종을 지키러가는 그제서야,
아버지 마음의 한 자락을 겨우 만질 수 있었다.
그러니 아버지가 '바보들의 병원'에 계신 것은 당연했다.
공항을 떠난 택시가 긴 다리를 건널 때
등 뒷쪽으로 무심하게 해가 지고 있었다.
일몰.
해가 진 자리를 어둠이 차지하듯이
갑작스레 내 가슴 속으로 먹먹한 어둠이 밀려들었다.
아버지 생의 마지막 불도
꺼져가고 있을 것이다.
아버지는 어떠실까.
외로우실까
두려우실까
아니면 고통 때문에 아무 느낌을 느낄 여력이 없으실까.
우리를 태운 택시는
반대편에서 거칠게 달려 오는 차량들의 불빛을 거슬러
빠른 속도로 어둠을 가르며 달렸다.
'부치지 못한 편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치지 못한 편지 (6) (0) | 2012.11.03 |
---|---|
부치지 못한 편지 (5) (0) | 2012.11.02 |
부치지 못한 편지 (3) (0) | 2012.10.20 |
부치지 못한 편지 2 (0) | 2012.10.18 |
부치지 못한 편지 (1) (0) | 2012.10.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