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치지 못한 편지 (6)
시간이 흐르며 아버지의 숨은 점점 거칠어졌다.
1-2초 때론 3초 정도 숩을 멈추었다 몰아 쉬곤 하셨다.
숨을 쉬는 고통, 아니 정확히 말하면
숨을 잘 쉬지 못하는 고통이 얼마나 괴로운 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단지 군대에서 화생방 교육시 받았던 개스실의 체험을 떠올리며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내 숨을 나누어 드릴 수만 있다면--------
의사표시를 하실 수 있는 동안
나는 우리와 우리 아이들의 이야기를 해 드렸다.
다섯 아이들 모두 잘 자라서 모두 열심히
자신의 길을 찾아가고 있다고 말씀 드렸다.
평소 건강하실 때에도
전화를 드릴 때마다 비슷한 레파토리가 반복되긴 하지만
아이들 소식은 아버지께 늘 새로운 활력소가 되는 것 같았다.
손자 손녀들의 이름을 손수 지으셨기에
아이들이 당신이 지은 이름에 걸맞게 사는 걸 보시면
특별히 즐거워 하셨다.
특별히 둘째 지영이가 대학원을 졸업하고
또 다음 학기부터는 박사과정을 시작한다는 소식을 전해드렸을 때
"거 봐라,' 지'영이는 학자가 될 거라고 하지 않았냐?"
하시며 즐거워 하시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특별히 막내 민기는 학교 성적도 시원찮은데
공부엔 전혀 관심도 없어서 걱정된다고 했더니
"다 제 길 찾아 갈 테니 걱정마라."고 하신 적도 있었다.
아닌게 아니라 민기는 음악을 하기로 진로를 결정한 후로는
열심히 자기 할 일을 하며 살고 있다.
세계 최고라는 Juilliard의 Pre College과정도 마쳤다.
대학 진학을 미루고
해병대에 지원해서 힘든 훈련을 마친 후
현재는 미 해병대 사령부 군악대에서 바순을 연주하고 있는데
제법 군복이 어울리는 사람이 되었다.
그런 막내 손자 민기를 누구보다도 보고 싶어 하셨던 아버지.
정복 입은 사진을 한 장 보내라고 하셨는데
미루고 미루다 그 작은 소원 하나도 들어드리지 못했다.
해병 신병 훈련소에 같이 입소한 800여명 중에서
2등인가 3등으로 졸업했다는 소식을 전해드렸을 때는
"내 뭐랬냐? 민기가 무얼 해도 할 거라로 하지 않았니?"
하면서 기뻐 하셨다.
특별히 군인이셨던 아버지는 막내 손자
민기에게 많은 애정을 가지고 계셨다.
한국말이 영 서툴어 어쩌다 할아버지와 통화할 때도
난감해하는 민기에게 아버지는 무언가 꽤 길게 이야기를 하시곤 했다.
두어 달 전쯤 아버지가 올 한 해는 넘기실 것 같다는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는
나도 마음의 여유를 좀 가진 게 사실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10월 첫 주말에 있을 예정이었던
큰아들 준기의 LSAT시험이 끝나면
두 아들과 함께 아버지를 뵈러 갈 계획을 세워둔 상태였는데
갑자기 위중한 상황을 맞아
모두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시간에게 감정이 있을 리 없지만
시간, 그 시간이라는 놈 앞에
'야속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야 할 것 같았다.
9월인가 아직 아버지가 말씀을 하실 수 있을 때,
전화를 걸어 그 계획을 말씀드렸더니
고목에 푸른 새 잎이 돋는 것처럼
맥 없던 아버지의 목소리에 갑자기 생기가 돌았던 걸 기억한다.
아마도 그 기억과 기대감으로 아버지는 얼마 남지 않은
삶의 시간을 좀 더 버티셨던 아닐까.
동생은 지난 여름 한국을 다녀왔다.
조카 하람이도 할아버지를 뵈었다.
동생은 그 때 찍었던 사진들을 아버지께 보여드렸다.
아버지의 한 눈에서 눈물이 몇 방울 흘렀다.
아버지 남은 목숨 중 얼마가 눈물 몇 방울이되어 몸 밖으로 빠져나오는 듯했다.
동생은 집으로 전화를 걸어 조카 하람이를 바꾼 뒤,
아버지 귀에 전화기를 대어 드렸다.
아버지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어어'라고 하시는 것 같았다.
마른 짚단에 바람이스치는 소리.
목소리에 물기가 없었다.
아마도 하람이는 또랑또랑하게
"할아버지 안녕하세요?"라고 했을 것이다.
그리고 별 반응이 없으니 전화기를 놓고 그 자리를 떴을 것이다.
전혀 안녕하지 못한 할아버지에게
가장 어린 손녀의 "할아버지 안녕하세요?"라는 한 마디가
작은 기쁨과 위로가 되었을까.
-그랬을 것 같다.
적어도 하람이 생각만으로 내게는 위로가 되었다.
맑고 또랑한, 그리고 장난기가 넘치는
하람이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잠 한 숨 못잔 내 피로가 가시는 듯 했다.
하람이가 레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짝 마른 아버지 입 안에 침이라도 고이게 하는 레몬 같은 존재,
하람이.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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