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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장례미사와 지진

장례미사와 지진

지난 금요일에는 Mel의 장례미사에 다녀왔다.

우리가 살던 Harrington Park의 OLV(Our Lady of Victory) 성당에서

그의 장례미사가 집전되었다.

OLV는 뉴저지에 살 때 우리도 그 성당에 미사참례하러 다녔기 때문에

참 친근한 곳이다.

 

일요일 오후 6 시 미사 때 Mel을 볼 수 있었는데

미사 전에 신자들에게 주보를 나누어 주거나

미사 중에는 봉헌 예절에 봉사를 했다.  

 

그러나 Mel과는 성당에서의 인연보다

같은 학부모로서의 인연이 더 앞에 있다.

우리 큰 아들이 4학년 때인가

Mel의 가족이 Harrington Park로 이사를 왔다.

Meldml 아들 Tony는 우리 아들 Andrew와 같은 학년이었다. 

처음 Mel을 보았을 때도,

그 이후에 우리가 Harrington Park를 떠났을 때도,

나는 Mel의 나이가 그렇게 많은 줄 몰랐다.

원래 얼굴이 동안인 데다가

얼굴에서 떠나지 않고 늘 머물고 있는

장난기 가득한 그의 미소는

그의 나이를 짐작하거나 의심할 여지를 주지 않았다.

그의 부고를 보고서야 그가 나보다 거의 스무 살이 더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부고를 보면서 나는 그의 아들 Tony가 태어났을 때

Mel은 이미 쉰 살이 넘었다는 사실을

뺄셈을 통해서 비로소 유추할 수 있었다.

 

Mel의 아들 Tony와 우리 아들 Andrew는 고등학교까지 줄곧 같이 다녔다.

학교에서 축구도 같이 했고

테니스 학교 대표팀에서 함께 활동을 했다.

아이들 경기를 보기 위해  경기장에 가면

늘 거기에 Mel이 있었다.

 

그리고 그의 목에는 언제나 라이카 카메라가 걸려 있었다.

 

그는 사진작가였다.

그러나 사진작가로서의 그보다는

친화력이 철철 넘치는 사람으로

나는 Mel을 기억한다.

손주뻘 되는 아이들과 아무런 간격을 두지 않고 어울리는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런 아이들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표정이

그의 사진 속에 남아 있다.

 

늘 밝고 명랑한 모습이 그의 등록상표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 동네 Harrington Park의 거의 모든 사람이

남녀노소, 나이 불문하고 그의 친구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금요일 오전 10시에 장례미사가 시작되었다.

 

미사 첫머리에 Tony가 자기 아빠를 기억하며 추모사를 했다.

그가 추모사를 하는 동안

미사에 참석한 사람들 사이에서 웃음이 대여섯 번 터졌다.

슬픔과 애도의 분위기가 압도적인 장례미사에서

아빠를 기억하는 아들의 입에서 나온 언어가

사람들의 웃음(폭소)을 유발했다는 것은

Mel이 어떤 사람이며,

어떤 삶을 살았는가를 이야기해 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늘 유쾌했던 Mel의 분위기가 성당 안에 그득했다.

 

Tony의 추모사가 끝나고 미사가 계속되었는데

사제가 복음 낭독을 시작하고 나서

갑자기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경험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나는 성당 앞길에 탱크가 지나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고

아주 미세하게 성당이 흔들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제는 복음 낭독을 중단했고,

사람들은 놀라움을 간직한 채 침묵 속에 사태가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나는 "이게 지진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때 누군가가 "Mel is here."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약간의 공포가 사람들을 휩싸고 있는 순간에

약간 우스개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는 사실은

세상을 떠난 사람의 성격을 그대로 나타내주는 것 같았다.

Mel을 기억하며 그의 삶을 대하는 태도에 영향을 받은 사람이

그런 말을 하고 또 그 말이  

두려운 상태에서도 사람들의 웃음을 터뜨리게 하는 건 아닐까?

 

장례미사에서 사람들을 웃세 만드는

유머의 힘, Mel은 그것을 가졌던 사람이라고 나는 기억한다.

 

만약 내가 세상을 떠났을 때.

우리 아이들은, 그리고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이야기할까?

 

Funeral Mass and Earthquake

Last Friday, I attended Mel's funeral Mass.

It was held at Our Lady of Victory (OLV) Church in Harrington Park,

where we used to live.

OLV holds sentimental value for us as we used to attend Mass there when we lived in New Jersey.

At 6 p.m. Mass on Sunday, we could see Mel.

Before Mass, he would distribute bulletins to the congregation,

and during Mass, he would assist with the offertory.

However, our connection with Mel transcended the church; it was rooted in being fellow parents.

When Mel's family moved to Harrington Park when our oldest son was in fourth grade,

Mel's son Tony was in the same grade as our son Andrew.

Even upon first meeting Mel and even after we left Harrington Park,

I never realized Mel was much older than me.

His perpetually youthful face, coupled with a friendly smile that never left,

made it difficult to gauge his age or doubt his vitality.

It wasn't until his passing that I learned he was almost twenty years older than me.

Reflecting on his passing, I could deduce that Mel was already in his forties when Tony, his son, was born.

Tony and our son Andrew remained close friends through high school.

They played soccer together and were both part of the tennis school team.

Whenever we went to watch the kids' games, Mel was always there, camera hanging around his neck.

He was a photographer, but more than that, I remember Mel as a sociable person.

His presence, mingling effortlessly with grandchildren and people of all ages, remains vivid in my memory.

The pure and beautiful expressions of those children are immortalized in his photographs.

His ever-cheerful demeanor seemed to be his trademark,

as nearly everyone in our neighborhood of Harrington Park considered him a friend, regardless of age or gender.

 

The funeral Mass began at 10 a.m.

Tony delivered a eulogy remembering his father, which prompted laughter from the attendees several times. I

n the overwhelming atmosphere of grief and mourning,

the language spoken by a son remembering his father evoked laughter from the people.

It seemed to narrate who Mel was and what kind of life he lived. Mel's cheerful presence filled the church.

After Tony's eulogy, as the priest began reading the Gospel, something I had never experienced before occurred suddenly. I heard what sounded like a tank passing in front of the church and felt a slight trembling, as if the church was shaking slightly. The priest paused the reading, and people waited in silence, holding onto their surprise.

I thought, "Is this an earthquake?"

Then someone whispered, "Mel is here.

" In a moment when some fear gripped the crowd,

there came a slightly whimsical remark, reflecting the personality of the departed.

Perhaps influenced by the attitude towards life he had, someone dared to speak, even amidst fear, and it brought laughter to the people.

I remember Mel as someone who possessed the power of humor to make people smile even at a funeral Mass.

 

-If I were to leave this world, how would our children and others talk about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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