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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치지 못한 편지

부치지 못한 편지 (1)

 

"때르르릉----, 때르르릉------"

 

비몽사몽 간에 들려오는 소리.

"저게 무슨 소리지?"

구식 자명종 소리 같기도 하고, 내 휴대 전화기 소리 같기도 한

소리의 출처를 잠 속에서는 정리 못한 채,

눈을 뜨고 거실로 나왔다.

 

'아,맞다, 주말에 집에 갔다가 아내는 집에 남고

바로 전 날, 일요일 저녁에 나만 부르클린의 아파트로 왔었지.'

비로소 내 위치와 상황이 대충 짐작이 되었다.

 

탁자 위에 둔 내 휴대 전화기에서 가느다란 불빛이 반짝이며 벨이 울리고 있었다.

월요일 오전 5시 20문 쯤.

 

전화기를 들고 발신자의 번호를 보니 영 낯이 설었다.

달콤한 내 잠 속으로 스며든 침입자에게 복수라도 하듯이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전화를 끊는 순간 아차 싶었다.

아버지 건강이 좋지 않아  지난 3월 초 한국으로 돌아가신 이후

잠 잘 적에 전화가 걸려오면 늘 불안한 마음으로 전화를 받곤 했었다.

혹시나 하고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나갔다.

전화를 무작정 끊은 일에 대해 후회를 할 새도 없이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이번에는 동생 전화였다.

직감적으로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을 알 수 있었고

가슴이 방망이질을 하기 시작했다.

 

" 형, 아버지가 위독 하시대."

 

늘 차분하던 동생의 목소리가 그날은 푹 젖은 채

내 귓 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순간 모든 것이 깜깜해졌다.

무얼 어떻게 해야할 지 내 사고 체계가 멎고 말았다.

동생이 급히 비행기 표를 구하기로 했고

자주 해외 출장을 다니는 동생이 그런 일은 잘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

나는 한국에 갈 준비만 하면 되었다.

지난 번 LA 여동생 집으로 부모님을 뵈러 같이 갈 때도

동생과 같이 갔었는데 여행 다니는 일 하나만은

흔히 하는 말로 '도사'인데다가

꼼꼼하고 치밀하게 일 처리 하는 걸 보면

영 아버지를 꼭 빼서 닮았다.

나는 부재중 가게일을 정리해서 맡기면 다른 건 신경 쓸 일이 없었다.

 

동생과의 통화가 끝나자 다시 전화벨이 다급히 울렸다.

아까 신경질적으로 끊었던 그 낯선 번호였다.

이번에는 당연히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그것도 아주 조심스럽게.

노안이 오고 난 후부터는 전화를 받는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잘못 엉뚱한 곳을 누르는 일도 가끔 일어나기 때문이다.

 

외사촌 동생 광수였다.

이메일로는 가끔 연락을 하지만 전화를 주고 받는 일은 없기에

번호가 영 낯이 설었다.

우리 형제 모두가 미국에 있어서 하지 못하는 자식노릇을

대신 해주는 고마운 존재다.

영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자기 모교의 교수로 바쁜 생활을 하면서도

틈나는 대로 우리 부모님까지 챙기는 광수의 전화는

아버지의 생명의 불꽃이 희미해져감을 떨리는 목소리로 확인시켜주었다.

 

광수에게 진 너무나 많은 빚.

 

삼년 전인가 한국에 갔을 때 광수가 추억 하나를 꺼낸 적이 있었다.

자기가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

내가 대학 다니며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영한사전을 사준 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정작 난 그런 사실이 있었는지조차 까마득히 있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그 하찮은 일을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는 것이었다.

고마움도 삼십년 세월이 지나면,

빛도 바래고 삭아버리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도

그는 늘 새로이 포장해서 그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외삼촌이 젊은 나이에 돌아가신 이후,

참 고생스럽게 살아온 외숙모와 광수 삼형제.

지금은 모두 안정적으로 삶을 꾸려가고 있고

형제들 간의 우애도 깊다는 말을 부모님들에게서 들을 때마다

마음으로 '하느님, 감사합니다'라는 기도가 절로 나왔다.

 

광수와의 톨화를 마치고

주말 동안 집에 들어가 NJ에 있는 아내에게 전활 걸었다.

 

내 전화를 받으면서 아내는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다.

아내의 목소리도 젖어 있었다.

내 목소리만 메말라 있었던 것 같다.

처음으로 맞아야 하는 임종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나를 세상에 있게한 존재가

이 지상에서 소멸한다는 소멸에 대한 슬픔 때문이었을까?

그 때의 복잡했던 감정의 가닥을 이주일이 지난 지금도 풀지 못하겠다.

아니 평생 동안 풀 수 없을런지도 모르겠다.

 

가게로 와서 내가 갑자기 자리를 비워야 하는 상황을 맞아

준비해야 할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를 했다.

직원들에게 전화를 해서

좀 일찍 출근하라고 일렀다.

세 명은 20년 넘게 나와 같이 인연을 맺고 있는 사람들이다.

내가 인복이 있는 탓인지

아니면 그들이 지지리 못나고 융통성이 없는 까닭인지

긴 세월을 함께 지냈다.

따지고 보면 고마운 사람들이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그 힘들고 고단한

이민의 삶을 헤쳐올 수 있었을까.

사실은 그들도 다 이민자들이다.

멕시코, 트리니다드, 에콰도르.그리고 한국, 미국

이런 각기 다른 출신 국가의 사람들이 모여

함께 살아가는 걸 보면 참 신기하다.

물론 삐그덕거림이 없을 수야 없겠지만 이만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을 보면 미국이란 나라의 힘의 근원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내 여권과 검정색 양복이며 넥타이 같은 걸 준비해서

아내가 부르클린으로 나왔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면서

막 바빠지기 시작하는 가게를 생각하면

떠난다는 일이 저으기 걱정이 되었다.

이럴 때마다 '내가 갑자기 죽는다면-------'

하는 가정으로 내 뒤에 남겨진 것들과 작별하곤 한다.

못 떠날 일이 없는 것이다.

참 많이 연습을 해서 제법 떠나는 일에 능숙해졌다.

 

그런데 정말로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도

내가 연습한대로 그렇게 떠날 수 있을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남은 일은 남아 있는 자들의 몫이다.

직원들에게 일을 분담시키고 등 뒤의 일은 잊기로 했다.

 

한국의 친구 몇과 지인들에게 간단히

이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동생과 공항에서 만나기로 하고

아내가 운전하는 차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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