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녀원 울 밑에 선 봉선화
아내에게 도벽이 생겼다.
거리의 꽃을 슬쩍슬쩍 집으로 가져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극성을 부리던 올봄부터였다.
처음엔 뜰에 지천으로 피어나던 제비꽃이 그 시초였다.
자유롭게 마트 출입을 할 수도 없는 처지라
채소 몇 가지로 비빔밥을 먹을 때였다.
아내는 그 채소 위에 제비꽃을 따다 치장을 했다.
비빔밥 위에 얹힌 채소의 내용은 우울했으나
제비꽃 때문에
한 끼 식사로 하는 우리의 비빔밥은 그렇게 호화로울 수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제비꽃을 메모지 같은 종이 위에 그리기 시작했는데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외출이 자유롭지 못할 때여서
집 안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좋은 방법이 그림 그리는 일이었다.
물감도 없어서 길거리의 꽃을 꺾어다
그 꽃을 으깨어서 물감으로 썼다.
사진으로만은 원근감과 입체감을 표현하기 어렵다면서
1일 1화(하루 꽃 하나, 그림도 한 장)를
아침 산책길에 집으로 모셔들였다.
꽃을 슬쩍슬쩍 꺾어오기는 했으나
하나의 원칙이 있었다.
길거리에 있는 화단에서만 꽃을 가져왔지
주택가 담장 안의 꽃은 언감생심 쳐다보기만 한 것이다.
그런데 드디어 오늘은 담장 안의 꽃을 한그루 모셔왔다.
물론 나는 파수꾼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아무도 지나가는 사람이 없었는데
거사(?)가 거의 끝날 무렵에 목격자가 하나 지나갔는데
젊은 아가씨가 조깅 중에 바로 옆으로 지나갔다.
그녀의 입을 막으려고 보았더니
마스크를 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굳이 그녀의 입을 막아야 하는 수고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 스스로 마스크로 입을 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아침 장물은 봉숭아 나무였다.
그것도 수녀원 뜰의 답장 옆에 핀 봉숭아 나무였다.
우리의 아침 산책길의 반환점 바로 옆에 성당과 사제관이 있고
사제관 바로 전에 수녀원이 있는데
수녀원 뜰에는 봄부터 이 꽃 저 꽃들이
서로 다른 빛과 향기를 지니고 교대로 피어나고 있는 중인데
요즈음은 수국과 봉숭아가 한창이다.
흔히 '사랑의 선교회'(Mission of Charity)라고 알려진
수녀원에서는 마침 아침 기도 시간인지
청아한 성가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수녀님들의 성가는 언제 들어도 영혼이 맑아지는 느낌을 받는데
오늘 아침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름다운 성가가 계속되는 동안
아내는 어린 봉숭아 나무 하나를 야무지게 뽑아서
미리 준비해 간 용기에 흙과 함께 담아
내 백팩에 넣었다.
수녀님들의 기도 시간 동안
우리는 완벽하게 그리고 안전하게 거사를 끝낼 수 있었다.
영화 '대부'의 한 장면이 오버랩되면서
우리는 가볍게 수녀원을 떠나 성당을 끼고 집에 돌아왔다.
우리가 수녀원의 봉숭아에 눈독을 들인 것은
아무래도 그 수녀원의 창시자인 '마더 테레사'와의 인연 때문이다.
우리 세탁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도
같은 수녀회 소속의 수녀원이 있는데
부활절과 크리스마스 때 작은 후원금을 전달한 것이 인연이 되어
때로 수녀님들과 함께 기도를 하기도 하고
마더 테레사가 그 수녀원을 방문했을 때
직접 찾아가 마더 테레사를 뵙는 영광을 누리기도 하였다.
그런 인연으로 범행 장소를 그 수녀원으로 정한 것인데
혹시라도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면
주저리주저리 그런 역사를 읊어댈 요량이었고,
무엇보다도 수녀님들은 우리(사실 나는 이 일에서 빠지고 싶다)를
너그럽게 보아줄 것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집으로 온 봉숭아는 누군가의 집 뜰로 옮겨 심을 예정이다.
그리고 내년에 다시 봉숭아가 그 집에서 피어나면
새로 이사할 집에도 한 그로 옮겨 심을 것이다.
그리고 원하는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줄 것이다.
수녀원 뜰에서 수녀님들의 기도와 성가를 듣고 자란 봉숭아.
그 봉숭아가 우리의 거룩한(?) 도둑질로 해서
수녀원 담장을 넘어 세상 곳곳에 퍼진다면
꽃과 함께 수녀님들의 기도와 노래까지 세상에 퍼지지 않을까?
거룩한 기도와 청아한 성가가 담긴 봉숭아 꽃물을
내년쯤 우리 손녀 Sadie의 손톱에 곱게 물들여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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