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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2 마일만 더 가면---

2 마일만 더 가면----

 

 

"여보 더 잘 거예요?

 

목소리 톤을 낮았고 단호했다.

 

살포시 실눈을 뜨고 보니

밖은 아직 어두웠다.

 

"몇 시나 되었어?"

 

"다섯 시예요."

 

여기서 더 눈을 닫고 등을 침대에 대고 있으면

앞으로 펼쳐질 내 삶이 질이 형편없어짐을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36 년을 한 이불을 덮고 살아온 사람이 어찌 모르겠는가.

 

아내는 벌써 30 분 전에 일어나

이미 출동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부러 소음까지 내면서 출동 준비를 하는 것은

나도 눈치껏 빨리 일어나라는 일종의 신호였던 것이다.

 

우리는 일단 출동 명령이 떨어지면

군대의 5분 대기조의 속도로 준비가 끝난다.

 

그렇게 호텔을 빠져나와 어둑어둑한 시골길을 달리다 보니

먼데 산 꼭대기에 해가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길 가에는 가끔씩 작은 연못이나 개울 같은 것이 있었는데

물안개가 피어올랐다.

 

그렇게 한 시간쯤 달려 도착한 곳이

Indian Head의 입구였다.

청년 하나가 산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차를 타고 입구 쪽으로 가니

작은 초소 같은 곳에서 공원 관리인이 나왔다.

 

그는 트레킹을 가기 위해서는

그곳에서 1 킬로 미터쯤 떨어진 곳에 주차를 해야 한다고 했다.

산에 가기 위해서는 골프장을 지나야 했는데

그 부근의 땅은 다 골프장에 속한 까닭으로

제법 먼 곳까지 걸어가서 주차를 하고 다시 돌아와야 했다.

이른 시각에도 주차장 안에는 대 여섯 대의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주차 공간은 차량 30 대로 제한이 되어 있었다.

그것은 참 좋은 소식이었다.

그곳으로 가는 사람의 숫자도 제한적이라는 의미였다.

우리는 그야말로 숲과 산을 거의 독점하며

황제 트레킹을 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은 것이나 진배없었다.

 

우리는 다시 차를 돌렸던

그곳으로 갔다.

관리인에게 트레킹에 대한 정보를 대충 들을 수 있었다.

3.5 마일을 걸어가서 표지판이 보이면

그 표지판이 이르는 대로 따라가면 된다고 했다.

사실 그 산에는 여러 갈래의 트레킹 코스가 있고

또 몇 개의 명소가 있긴 하지만

가장 인기 있고 대표적인 목표가 Indian Head이기에

운동화 차림의 나를 보고

가장 쉽고 빠른 길 하나를 추천해준 것이었다.

 

목적지로 가기 위해서는 문을 하나 지나야 했다.

한국에서 절집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일주문을 지나고

사천왕문을 지나야 하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문을 넘으면 속세를 떠나

어떤 신비하고 신성한 곳으로 들어가는 통과의례를 치르듯

우리는 그 문 안으로 조심스레 발길을 들였다.

 

포장은 되어 있지 않았지만

차 두대가 다닐 수 있는 제법 너른 길이 이어지고 있었는데

빼곡한 숲 속인 데다가 해도 아직 본격적으로 뜨지 않아서

어둑어둑했다.

 

얼마를 걷자 해가 뜨고 간간히

나뭇잎 사이를 비집고 땅에 내려앉았다.

가끔씩 햇살이 고인 물에 내려앉으면

물빛은 초록 물감을 풀어놓은 것 같았다.

 

아내는 이따금씩 길 가에 핀 풀꽃들을 보며 즐거워했다.

우리의 발걸음은 그만큼 더디었지만

우리의 삶이 그러하듯

목표에 이르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로 옮기는 여정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목표에 이르지 못해도 그곳으로 가는

발걸음이 명랑했다면 삶은 그런대로 근사하지 않을까?

 

한 시간 조금 넘게 걸었을까,

우리는 드디어 관리인이 추천해 준 팻말을 만났다.

평탄하고 쾌적한 걷기는 끝나고

숨차고 땀나는 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빛이 거의 들지 않는 산길을 가다 보니

나는 별로 힘에 부치지 않았는데

다리에 작은 통증을 가지고 있는 아내는

조금 힘들어하는 기색이 보였다.

 

"돌아갈까?"

 

나의 말에 아내는 잠시 동요하는 것 같았다.

평소에는 잘도 걷는 아내가 몇 번씩 쉬어가자고 하기에

내가 짐짓 물어본 것이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다잡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때 거의 뛰다시피 산을 내려오는 젊은 여자를 만났다.

나는 얼마나 더 가야 목표에 이를 수 있냐고 물어보았다.

그녀의 입에서 2 마일 정도 더 가면 된다고 했다.

2 마일이면 3 킬로 미터가 넘는데

아침을 먹지 않아서 허기가 지는 건 그렇다 쳐도

물마저 챙겨가지 못해서 생기는 갈증은 또 어찌할 것이지

덜컥 걱정이 되었다.

 

다시 아내에게 물었더니 더 가자고 했다.

그래서 한 20 여 분 고단한 발걸음을 옮겼는데

청년 하나가 하산을 하고 있었다.

그 청년에게 얼마나 더 가야 목표에 이를 수 있냐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100 여 미터만 가면 된다는 것이 아닌가?

 

먼저 만났던 젊은 여인 말이 맞는다면

적어도 한 시간 반은 더 가야 할 길이었다.

 

청년의 말에 힘을 얻어 조금 더 산을 오르자 

목표 지점의 팻말이 보였다.

목표에 도달했다는 가쁨과 안도감이 동시에 몰려왔다.

화살표가 가리키는 대로 숲 길을 10 여 미터 뚫고 가니

비로소 나타나는 광경에 탄성이 새어 나왔다.

 

절벽 아래에 호수가 신비롭게 펼쳐져 있었는데

그 풍광은 내 삶에서 만난 몇 안 되는 절경에 꼽힌다.

거기엔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청년이 있었는데

해뜨기 전에 도착해서 거기서 일출을 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감동에 겨워하는 우리만의 비밀스러운 시간을 위해

서둘러 자리를 비켜 주었다.

 

먼저 만났던 여자의 말에

지레 겁을 먹고 발길을 돌렸다면

우리는 이렇게 감탄의 신음이 절로 나는

감동의 순간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힘이 들고 지친 상태이지만

2 마일만 더 가면 거기엔 경험하지 못 한

새로운 세상이 존재할 수도 있는 것이다.

(때론 그 2 마일이 실제로는 1/4 거리밖에 되지 않을 경우도 있다.)

 

2 마일의 고단함을 감수하기로 마음을 먹은 보상으로

우리는 감동스러운 풍경을 마음속에 저장할 수 있었다.

삶이 주는 고통과 만날 때

그 장면을 꺼내보며 위로와 격려를 받을 수 있는

그런 종류의 내밀한 마음의 보물은

오로지 2 마일만 더 가겠다는 결심 하나로 건진 것이다.

 

쫄쫄 굶고 물도 마시지 못했지만

내려올 때의 그 상쾌했던 걸음이 오늘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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