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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꼰대, 라떼

꼰대, 라테

 

 

 

 

요즈음 아침 산책길을 나서면

먼저 Broadway를 지나서 Macon을 만나고

그 길을 따라 다운타운 쪽으로 쭈욱 걷다가

Throop을 만나면 성당을 끼고 좌회전을 해서

Macdonough를 따라 집으로 돌아온다.

 

다시 말하자면

Macon을 따라갔다가 Macdonough로 돌아오는데

마주쳐야 하는 길이 Broadway에서 시작해서 Throop에 이르는 10개에 다다른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걸었는데

두어 달 전에 처음부터 외워보려는 노력을 하기로 했다.

점점 기억력이 모래성 무너지듯

그렇게 빠른 속도로 허물어지는 나이에 이르렀기에

치매 예방에도 도움이 될까 해서 그 순서를 처음부터 차곡차곡 외운 것이다.

 

그런데 별 노력 없이 두세 번 반복한 끝에

쉽사리 순서대로 외울 수 있었다.

내가 참 자랑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왕년에 암기 하나만은 뛰어났던 내가 아니던가.

 

-그러면 그렇지.-

 

왕년에 내 암기 능력에 대한 엔화는 거의 끝이 없을 지경인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국민 교육 헌장' 암기했을 때였다.

 

내가 국민학교 5 학년 때 '국민 교육 헌장'이 반포되었다.

각급 학교에서는 교육부의 압력을 받아 

그것을 학생들에게 강제적으로 주입시키기 위해서

무진 애를 쓰고 있을 때였다.

 

그것은 유신 독재로 가는 서곡 같은 것이었는데

국민학교 5학년 짜리 아이에겐

거기에 대한 분석이나 비판 같은 것을 요구하지 않고

무조건 외우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고,

특별히 나에게는 굳이 눕지 않고

편안히 앉아서 먹어도 되는 떡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어느 날 종례 시간에 '국민 교육헌장'을 다음날까지 

외워오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나는 다음날 조례 시간에 외운 사람 손을 들라는

담임 선생님의 말씀에 제일 먼저 허공을 찌른 것이 나의 손이었다.

그리고 나는 교장 선생님 앞에서

전교생 처음으로 '국민교육헌장'을 술술 외웠다.

담임 선생님은 자랑스러운 미소를 숨기질 못 했다.

 

그 외에도 나의 무공 담은 끝이 없이 이어지지만

예비고사 보던 날 아침에 국사 교과서 한 권을 띤 것이

내 암기 신화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데

덕분에 나는 서울 예비고사에 당당히 힙 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살다 보니 다른 능력은 물론이거니와

내 출중한 암기력조차

영광의 시대는 가고 영광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그래서 지난주에는 멀쩡히 잘 외웠다고 믿었던

나의 산책길 이름을 조용히 되뇌기 시작했다.

그런데 Macon과 Macdonough를 빼고

10 개가 되어야 할 길 이름 하나가 내 기억의 지도에서 실종이 되고 말았다.

낭패도 그런 낭패가 없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잃어버린 길 이름 하나가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아, 야속한 세월은 내 머리를 하얗게 세세 만들었고

내 기억력마저 앗아가 버린 것이다.

나는 별별 생각을 다 했다.

-원래 길이 아홉 개였는데 내가 착각을 한 건 아닐까?-

 

다음날 산책을 하며

내 기억의 지도에서 사라진 길을 찾았다.

'Stuyvesant'

 

10 마리 양 중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은 기쁨이란----

 

이런 상태에 이른 나는

어느덧 꼰대의 경계에 한 발을 들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시절 말이 통하지 않고

자기주장만 있는 아버지나 선생님을 일컬을 때 꼰대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아마 내가 그런 상태에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이 당초에 10 개가 있었음에도

생각나지 않는 길 이름 하나는 잊은 채

기억나는 9개의 길이 전부라는 믿음을 가지고

부득부득 우기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리고 꼰대의 또 다른 특징 하나가

'라테'라고 하는데

내가 왕년에는 하면서

지나가서 이미 사라진 시간의 허상을 다시 불러와

끝없이 재생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 같은데

'왕년에 암기력 하면 하면 나지, 나.' 하면서

아무도 호응해주지 않는 '라테'를 반복하면

그것이 바로 꼰대가 되었다는 명확한 증거다.

 

나이가 들수록 지갑은 열고

입은 닫으라는 말이 있다.

왕년의 나, 지나간 나는 잊고 현실의 나를 인정하면서

입은 닫은 채

호탕하게는 아니어도

만나는 사람들에게 고소한 라테 한 잔을

오붓이 대접하기 위해

즐겁게 지갑을 열면서 나이를 먹고 싶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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