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의 이야기

Sponge Bob과 아버지 날 ( Father's day)

Sponge Bob과 아버지 날 ( Father's day)

 

 Desi의 Pre-K 졸업 사진

Desi가 그린 Sponge Bob

 

"여보, 당신은 '스폰지 밥(Sponge Bob)이 뭔지 알아?"

 

2 주 전 손주들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내가 아내에게 물었다.

설마 알까(?) 하고 물은 것인데 아내에게서 바로 답이 돌아왔다.

 

"그건 아이들 보는 만화영화예요."

"우리 아이들도 어릴 때 다 그거 보며 자랐어요."

 

나는 순간 머쓱해졌다.

우리 아이들이 보고 자랐다면 적어도 30 년은 훌쩍 지난

연식이 제법 된 만화영화인데

아직도 어떤 식으로든 tv를 통해서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그 신기함은 이내 부끄러움에 밀려 내 마음에서 멀어지고 말았다.

말하자면 우리 아이들이나 우리 손주들 모두가 보고 알고 있는 만화영화를

나만 본 적도 알지도 못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아니면 보기는 보았는데 스쳐 지나가서

마음에 담아두질 않아서 생소할 수도 있었다.

어쨌든 내 마음이 함께 하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내가 아내에게 '스폰지 밥'의 존재를 물어본 것은

손자 Desi와의 대화에서 그 명칭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손주네 집을 방문했을 때

Desi는 내 손을 잡아끌고 지하실로 내려갔다.

tv를 켜더니 자기랑 함께 보자고 했다.

tv에서는 실제 사람과 다람쥐 세 마리가 함께 나오는 영화인지

tv show인지가 방영되고 있었다.

사람은 실제 배우가 연기를 하고 다람쥐는 만화영화로 되어 있는데

이 둘을 합성한 것이었다.

 

다람쥐 중 빨간 옷을 입은 다람쥐 이름이 앨버트였던 것 같은데,

Desi는 제 할아버지가 그에 대한

아주 사소한 지식조차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열심히 설명을 하는데

대화의 거리는 지구와 달의 그것을 훨씬 넘어선 것 같았다.

 

Desi와의 대화 중 나온 낯선 음절이 바로

아내에게 질문했던 "Sponge Bob'이었다.

 

그때 Desi와 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물 같은 것이 흐르고 있었다.

소리는 들려도 그것은 소리일 뿐

내 안에서 분석되고 해석이 될 수 없는

외계어 같은 것이

Desi의 입에서 나온 말들이었다.

 

Tv 화면도, Desi의 언어도

낯설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 낯섦이 어색하기도 하고

지루하기도 해서 슬그머니 지하실을 빠져나와

광명의 햇살이 눈부신 뜰로 나왔다.

 

아내와 큰 딸, 그리고 손녀 Penny와 Sadie가 있었다.

잠시 지하실과 답답한 기운이 흐르던

Desi와의 시간에서 해방된 자유의 공기를 마실 수 있었다.

 

탈출에 성공했다고 안심하려는 순간

Desi가 밖으로 나왔다.

손자의 표정에 지하실의 눅눅함에 배어 나왔다.

 

그리고 나와 같이 tv를 보자고 재차 요청을 하는 것이 아닌가?

참으로 난감한 순간에

아내로부터 수업 끝을 알리는 해방의 벨소리가 들려왔다.

 

"여보 이제 집에 가요."

아이들은 일요일이어서 아침 식사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차에 타서 떠나려는데

Desi는 자기 엄마에게 얼굴을 묻고 울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함께 tv를 보고 싶어 하는

마음과 바람이 산산조각이 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계속 마음이 아팠다.

그 아픔은 열흘 가까이 지난 오늘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큰돈이나 시간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tv를 보는 손자 곁에 잠시 머무르는 일을

답답하다는 이유 하나로 차 버린 기억은

Desi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상처로 남았다.

 

따지고 보면 

나의 그런 태도나 마음은 우리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하며 살았던 것은 아닐까?

 

함께 있어주기를 바라는 아이들의 마음을 배반하고

나만의 길과 시간을 고집하며 살아왔다는 사실은

우리 아이들도 보고 자랐다는 'Sponge Bob'에 대한

기억의 부재가 증명해준다.

 

이번 일요일, 아버지 날에는

Desi와 영화 한 편을 보기로 약속했다.

아버지 날에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선물을 받고

대접을 받는 것보다

손자와 함께 손자가 원하는 일을 해 줌으로써

내 부실한 (할) 아버지로서의 태도를 참회하고 반성하기로 한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에

반드시 큰돈이나 긴 시간이 필요한 것 같지는 않다.

원하는 시간에 잠시라도 함께

마음과 몸을 함께 하는 것이 사랑이 아닐까?

 

선물이라는 의미의 영어 'Present'가 

현재, 그리고 함께 있음이라는 의미를 동시에 갖고 있음을 생각하며

올 해의 아버지 날에는

Desi에게 함께 있음을 선물함으로써

서로 간의 존재의 소중함을 느껴보고 싶다.

내 존재를 선물함으로써

나도 손자의 존재를 선물 받는 그런 시간을 보내고 싶은 것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Desi와 함께 볼 영화 'Toy Story'를 미리 한 번 보려고

인터넷을 검색하는 내 손가락이 이렇게 가벼운 것이지

예전엔 미처 몰랐다.

 

올 해의 아버지 날은

선물을 받기보다는 참회하고 선물을 주는

아주 뜻깊은 날이 될 것 같다.

진짜 (할) 아버지의 마음으로 맞는 

첫 번 째 아버지 날이니 말이다.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탁소에서 생긴 일 - 별 다섯의 무게  (0) 2020.06.24
(할)아버지의 날  (0) 2020.06.22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0) 2020.06.11
아, 어쩌란 말이냐  (0) 2020.06.03
덜어내기, 혹은 지우기  (0) 2020.0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