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정말 안녕, 91 Higgins Place 그리고 Harrington Park
비엔나에서였을 것이다.
우리 집의 클로징이 완료되었다는 연락을 받은 것이.
8 월 30일 자로 만 스무 여섯 해를 살아온 우리 집이
다른 사람의 소유로 넘어갔다는 소식은
가슴 한 편이 모래성이 파도에 씻겨 사라지는 것 같은 서운함과 함께
미국에서 오스트리아까지 그 먼 거리를
초대하지 않은 손님처럼 우리에게로 온 것이었다.
그 따뜻했던 공간,
그리고 너무 소중해서 아프기까지 한 그 시간들과의 이별.
여행 중에 나는 이미 예정되어 있던 그 이별과 마주해야 했다.
1993 년 2 월 어느 날이었다.
우리가 우리 집과 처음으로 조우한 것은.
아내와 나는 1 년 전부터 롱 아일랜드 지역으로 집을 보러 다니고 있었다.
우리 부부와 아이들 넷,
그리고 그 해 8 월에 출산 예정이었던 막내 아이까지 태어난다면
방 세 개짜리 아파트로는 우리 식구가 살 수가 없어서였다.
다행히 큰 아들이 태어난 1990 년부터 시작한 세탁소의 벌이가 괜찮아서
융자를 끼면 작은 집 하나를 장만할 수 있을 정도의 여유가 되었다.
그러나 롱 아일랜드 지역의 집 값은
뉴욕 시에서 가까운 곳일수록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싸서
번번히 우리 식구가 살 수 있는 집들은 아쉽게 포기해야 했다,
우리의 꿈은 뉴욕 시에서 점점 먼 곳으로 멀어지게 되었다.
그렇게 집을 보러 다닌 지 1 년이란 세월을 보내게 되었는데
어느 날 장모님께서 뉴저지 쪽으로 집을 알아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하셔서
시간을 내어 뉴저지로 향했다.
부동산에서 우리에게 소개한 집은
새로 개조를 하고 공사를 해서 썩 괜찮긴 했는데
우리가 가진 예산이 허락하지 않았다.
하릴없이 부르클린으로 돌아오려는데
부동산 중개인이 조금 더 멀리 가서
집 한 채를 더 볼 것을 권유했다.
어차피 뉴저지까지 갔으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첫 집에서 10 여 분 떨어진 곳에 있는 집을 보게 되었는데
그 집이 우리 식구의 26 년 동안의 인연이 된 것이다.
집도 집이려니와 동네 어귀로 들어서며
숲이 동네의 배경이 되어주는 자연에 홀딱 반했다.
집보다 먼저 동네에 마음을 빼앗겨 버린 것이다.
우리 예산과 집 크기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집이었다.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아내와 나는 완벽한 일치를 보았다.
그 자리에서 집을 사겠다고 했더니
부동산 중개인이 32 만 5 천 달러의 집 값에서 오천 달러를 빼 주었다.
보통 집을 살 때 Inspection을 하는데 우리는 생략을 했다.
이리 보고 저리 따지며 집값을 깎으며 흥정을 하는 데 보통인데
우리가 너무 쉽게 결정을 하니 중개인도 적잖이 당황한(?) 것 같았다.
(아마도 우리 같은 방식으로 집을 사는 고객은 전에도, 그 후에도 없었을 것 같다.)
자연 환경이며, 교육, 어느 하나 빠지지 않는 좋은 곳에
우리는 집을 갖게 되었다.
문제는 나의 출퇴근이었다.
집에서 세탁소까지의 거리가 30 마일 가량 되었는데
길에서 보내는 시간이 너무 많은 것이 흠이었다.
차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하루에 평균 두 시간 반에서 세 시간은 되었다.
비가 오는 금요일 저녁의 퇴근 길은 세 시간을 거뜬히 넘기기 일쑤였다.
그렇게 20 년을 넘겨 출퇴근을 하다 보니
만성피로에 시달리게 되었는데
영어 표현처럼 'No Pain, No Gain'이 삶의 진리이다.
나의 희생의 대가로 아이들이 좋은 환경에서 잘 자랐으니
이 또한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아름다운 환경 속에서
아이들 다섯은 다 잘 자라서 다 제 갈 길로 접어 들었다.
아이들이 다 떠나고 난 뒤,
5 년 전부터 부르클린 아파트에서 살게 되었는데
어느새 내 전신을 감싸고 있던 만성피로는 사라지고
몸도 아주 건강해지고 정신도 맑아진 것 같다..
이제 우리 부부는 새로운 집을 찾고 있는데
대서양 바닷가 바로 옆에 있는 콘도가 아내의 마음 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지금 짓고 있는데 올 해 말이나
내년 초에 완공될 예정이라고 한다.
크기로 따지면 우리가 살던 집의 1/4이나 1/5이 채 안 되지만
우리 부부가 살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열심히 일을 해도 집을 소유하며 살기가 어려운데
우리는 대식구가 부족함 없이 잘 살 수 있었던 집을 살 수 있었고
은퇴 후에도 남은 삶을 살 수 있는 집을 가질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신은 하나의 눈을 닫으며
새로운 문을 열어 놓으신다.'
서운함은 뒤에 남겨 두고
새로운 문을 여는 기대감을 가질 때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집을 둘러보러 갔다.
우리집 앞 면.
아래층 왼 쪽이 우리 부부 침실.
그리고 아들 둘의 침실.
이 층엔 둘째와 세 째 딸의 침실 그 가운데 가이 쓰는 화장실이 있다.
복도를 사이에 두고 큰 딸의 방이 있는데 화장실이 딸려 있다.
집 뒷 태
꽤 넓은 데크가 있는데 여기 온갖 꽃나무와 다육이 화분이 있었다.
한 때는 화분이 200 개가 넘은 적도 있다.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으면 화분을 집 안으로 들이고 내는 사역을 해애 했다.
우리 침실 창문 바로 앞에 피는 꽃나무.
진달래가 여러 송이 함께 피어나는 것 같은 꽃.
겨울엔 나뭇잎이 온도게 역할을 한다.
추운 날에는 나뭇잎이 뒤츨린다.
축구하러 가며 옷을 껴 입어야 함을 알려준다.
왕 벚꽃 나무는 5월이면 가지가 휘어질 것처럼
탐스런 꽃을 피운다.
방 안이 환하다.
벚꽃잎이 떨어지며 그 아래 철쭉이 벌어진다.
내가 사랑했던 Japanese Maple.
정원사의 말로는 한 그루가 1 만 달러 정도 된다고----
폐허가 된 텃밭 http://blog.daum.net/hakseonkim1561/204
한 때는 오이며 호박, 상추와 쑥갓, 깻잎, 토마토 등.
우리 땀보다 더 많은 소출을 이 곳에서 거두었다.
지금은 개망초와 미나리가 그득하다.
그 날 오이 한개를 따서 먹었다.
달고 아삭아삭한 오이 맛이 슬펐던 기억.
텃밭의 부추
비오는 일요일 낮에는 부추전을 먹었다.
벚꽃 떨어진 모습
텃밭의 원추리
양귀비도 텃밭에서 피어났다.
거실
2 층엔 다른 집에는 없는 발코니가 있다.
집을 증축하며 아이들 의견을 듣고 만들었다.
아래층에서 아이들이 연주를 하면
엄마 아빠는 위층 발코니에서 관람하라고---
벽난로.
처음에 이사 가서는 조금 선선히면 장작불을 지;폈다.
마시 멜로우도 구워 먹었다.
우리 침실에 딸린 자꾸지.
물 낭비가 심한 것 같아 한 두 번 하고 말았다.
스팀 사우나도 있다.
지하실 서재.
그러나 내가 공부할 일도 없었고 시간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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