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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구들 이야기

와서 아침을 먹어라

와서 아침을 먹어라

 


 

 

 

-애리조나 장인 장모님 집에 찾아온 아침-

 

9 그들이 뭍에 내려서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
10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너라.”
11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 그물을 뭍으로 끌어올렸다.
그 안에는 큰 고기가 백쉰세 마리나 가득 들어 있었다.
고기가 그토록 많은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1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요한 21, 9-12)

 

밤 새 비가 내렸다. 토요일 밤부터 시작하는 비가 일요일 내내 내릴 것이라는 일기 예보를 보고 어제부터 주일 아침 축구는 마음으로 접었다.
무언가를 포기하고 나면 주어지는 자유.
선택이 주어지는 것 자체가  삶의 스트레스다. 선택할 수 없을 때 분별도 사라지고 열반의 세계에 든다.

축구를 하지 않으면 주일 아침에 너덧 시간 자투리가 생긴다.

의무가 쏙 빠진 시간은 말 그대로 힐링의 흐름이 된다. 비 내리는 창가로 길 위의 우산들이 걸어 다니는 것을 보다가 턴 테이블에 레코드 한 장 올리고 음악을 들으며 멍 때리기를 하기도 한다.
아내와 플러싱에 있는 한인 성당의 11 시 미사에 가기로 했다.
주일 미사에 가면서 내내 미사 후에 어디 가서 무얼 먹을까가 출발하기 전부터 화두였다.
너무 많은 선택의 여지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플러싱 한인 타운에 사는 고교 동기에게 좋은 곳을 추천하라고 카톡을 보냈더니 두 친구에게서 두 곳의 추천이 들어왔다.
그때 갑자기 머릿속에 성경 말씀이 스쳐갔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

등등.

 

일주일 내내 무엇을 먹을까 걱정하며 살다가

주일에 성당에 가는 차 안에서까지

무엇을 먹을까를 걱정하다니------

 

50 년도 넘게 신앙생활의 경력(?)을 가진 내가 

겨우 이런 수준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내에게 오늘 복음 말씀을 찾아서 들여 달라고 하였다.

 

아내가 읽어주는 복을 말씀을 들으며

나는 우리 아버님(장인)이 문득 떠올랐다.

 

지금은 자식들이 있는 뉴저지에 돌아오셨지만 오셨지만

은퇴하시고 십 수년을 애리조나에서 사셨다.

 

우리가 애리조나를 방문할 때면

아버님은 우리보다 훨씬 전에 일어나셔서

아침상을 차리셨다.

 

베이글을 토스터에 넣고 구우시고,

식탁 위에는 버터와 크림치즈를 준비해 놓으셨다.

뒷 뜰에서 자라는 새콤 달콤한 자몽도 반으로 갈라

접시 위에 얹어 놓으셨다.

 

우리가 일어나면

물을 데우시고

커피를 타 주셨다.

인스턴트 커피면 무슨 상관일 것인가?

굳이 커피 맛을 따질 필요도 없이

우리는 아버님 사랑을 홀짝홀짝 들이켰다.

 

비까 번쩍하지는 않아도

아버님의 사랑이 담긴 아침 식탁은 

아직도 따뜻한 기억으로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오늘의 복음은 

밤 새 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있다가 

지칠 대로 지친 제자들에게 배 오른쪽에 그물을 내리가 하시고

고기를 그물이 터지도록 잡은 제자들에게

빵과 숯불에 구기를 구워 놓고

"와서 아침을 먹어라."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이었다.

 

밤 새 고기를 잡느라

제자들은 얼마나 지쳐 있었을까?

몸도 몸이지만 고기가 잡히지 않을 때의

속이 타들어가는 십정은 또 어땠을까?

 

"와서 아침을 먹어라."

 

그 아침은  제자들에게 다시 기운을 차리고

희망을 갖게 하는 한 끼였을 것이다.

 

부모의 사랑이 따지고 보면 별 것인가.

 

지친 자식들에게 한 끼 따뜻한 사랑의 밥으로

배를 불리는 일이 아닐까?

밥을 먹으며 몸과 맘을 추스르고

다시 일어서 걸을 수 힘을 주는 밥 한 끼 정성껏 먹이는 일일 것 같다.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꼭 아침이 아니어도

아무 때나 "와서 한 끼 먹어라."라고

말을 할 수 있는,

그런 마음과 사랑이 넉넉한 아빠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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