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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구들 이야기

한 턱 쏴!

한 턱 쏴!


어제 오후에 턱시도 대여하는 곳에 가서 치수를 쟀다.

난생 처음 입어 보는 턱시도.

딸 둘 결혼할 때는 있는 양복 중에 골라 입었는데

이 번엔 아들 결혼에는 

남자들끼리 같이 턱시도를 빌려입자고 아들이 제안을 했기 때문이다.

(제안이지만 꼼짝할 수 없는 압박감마저 느꼈다.)


내 고집을 아들 앞에서는 피울 수 없어지는 무력감과 나약함을 뭐라고 설명할까?


아들은 일 때문에 조금 늦는다고 해서

먼저 와 기다리던 사돈 청년(사실 막내 아들 친구)과

먼저 치수 재는 일을 시작했다.


사돈 청년의 이름이 요즘 한국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어떤 연예인의 이름과 같아서  

속으로 킥킥대며  

어색하고 구닥다리 느낌이 나는 

사돈 청년이라는 호칭을 쓰고 있음을 양해하시길 바란다.

그래도 궁금할 것 같아 힌트를 주자면

예비 며느리의 이름이 유리니까 

궁금하면 추측해 보길 바란다.


나는 대충 간단하고 단순하게 일을 마쳤다.

(입어 보고 치수 재는 데 5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나중에 합류한 아들과 사돈 청년은 

이 것 저것 입어보고

단추와 구두 손수건 같은 작은 것에도

신경을 쓰느라 40 분 정도 걸린 것 같다.


이럴 때 막내 아들이 생각이 난다.

이 자리에 함께 할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이 턱시도 대여 업체는 전국적인 체인망이 있다고 하는데

뉴 올리언즈에도 지점이 있어서

막내 아들은 그 곳에서 옷을 맞출 거라고 한다.


제일 나중에 온 사돈의 fitting도 끝나고

우리는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었다.


최근에 사돈 청년의 봉급이 인상 되었다는 이야기를 

아들로부터 전해 들은 터라

나는 그에게 "한 턱 쏴!"라고 치수 재는 동안 

농담처럼 말을 건넸지만

사돈 청년은 정작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 했다.


"Ask your sister."

예비 며느리인 자기 누나에게 그 뜻을 물어보라는 말이었다.


예비 며느리가 새로 직장을 구했을 때

우리는 "한 턱 쏴!"라고 하며

그 때까지도 한 턱 쏘는 게 무슨 뜻인지를 몰랐던 그녀에게

뜻을 강제로 알려 주고 

기어이 한 턱을 쏘게 했던 기억이 나서였다.

예비 며느리는 이제는  "한 턱 쏴!"의 의미를 명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말이 서툰 사돈 청년은 내 말에 

몇 번 발음을 연습했고 교정도 받았다.


그런데 저녁 식사 후에

웨이트레스에게 계산서를 가져다 달라고 눈짓을 하고

지갑을 꺼내 들었는데

막상 웨이트레스가 계산서를 가져오자

사돈 청년이 빛의 속도로 계산서를 가로채더니

식사비를 계산하는 것이 아닌가?


사돈 청년은 어릴 적부터 우리 막내 아들과 절친인데

어릴 적부터 엄청 빠르고 축구도 엄청 잘 해서

영국의 맨체스터 유나이니드 축구단에서 운영하는

축구 캠프에도 다녀 왔다.


축구 뿐 아니라 쏘는 일에도

엄청 빠름을 그는 보여 주었다.

아마 세상 살아가는 일에도 그럴 것 같다.


우리는 함께 얼마간의 시간을 

같은 공간 속에서 보냈으므로

자기 누나에게 전화할 사이도 없다는 사실은 확실했다.

따라서 나는 그가 그 때까지도 "한 턱 쏴!"의 의미를 알아들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록 장난처럼 "한 턱 쏴!"라고 했지만

그 말이 현실로 되어 내게 되 돌아 온

가장 빠른 예를 그 청년은 몸소 보여 준 셈이 되었다.


사실 '한 턱 쏘'라는 말에는

무엇을 바라서가 아니라 

함께 축하하고 기뻐한다는 의미가 더 진하게 녹아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그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청년은 자기가 경험한 기쁨과 감사를

아주 빠른 속도로 우리와 나누었다.


이 만큼 나이가 먹었음에도

나는 과연 한 턱 쏘는 일을

근면하고 성실하게 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질문지를 그 청년은 내 손에 슬그머니 쥐어 주었다.


내가 지금 숨 쉬고

한 끼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밥을 먹으며 살아가는 데는

한 턱 쏴야 할 수 많은 사람들 공이 크다.


정작 남에게 한 턱 쏘라는 주문만 외우고

내가 한 턱 쏘는 일에는 

한 없이 게으르고 수동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는 내가 받고 누리고 있는 것에 걸맞게 제대로 한 턱을 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그런데 정말 궁금한 게

그 청년은 나 모르는 동안 자기 누나에게 전화를 걸어서 그 뜻을 물어 보았을까?


(치수를 재는 동안 심심풀이로 거울 보며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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