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약 먼저 먹어- 친구의 책 선물
고단하고 긴 하루였다.
나는 아침 여섯 시 50 분에 시청 앞에서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고등학교 동기들과 정선, 평창 경계에 걸쳐 있는
백운산 산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백운산을 떠난 버스가 우리 일행을
죽전에 내려준 것은 막 오후 7 시가 넘었을 때였다.
경상도가 고향인 친구의 표현을 빌자면
참으로 '된' 시간을 등 뒤로 흘리고 난 뒤
산행을 함께 한 우리 일행과
산행은 하지 않고 뒷풀이에만 참석한 친구들을 합치니
얼추 스물 대 여섯이 되었다.
산행 뒷풀이 겸,
나의 귀국을 환영함과 동시에,
다음 날 떠나는 환송식을 겸한 자리였다.
즐거운 인사말이 오가고 분위기가 풍선처럼 붕 떠오를 때 쯤
K가 일어나서 나에게 가운데로 나오라고 하더니
책 세 권을 선물로 주었다.
K는 우리 동기들 모임 중 하나인
'33 서당'의 회장 직책을 맡고 있는 친구인데
기꺼이 자신 회사의 사무실을 우리 모임 장소로 개방하고 있으며
인물 됨됨이로 보나, 용모로 보나
훈장의 직책에 딱 들어맞는 인물이다.
책을 많이 읽어서인지
나이 들어가며 점점 더 깊은 멋이
얼굴에 들어난다.
나는 한국에 갈 때마다
가능하면 이 모임에 참석하려고 하는데
올 해는 매화 피는 시기에 맞추느라 아쉽게도
서당에 가지 못 했다.
서당 모임에서는 매 달 책 한 권 씩 읽은 뒤에
독후감을 쓰고, 만나서 소감을 나누는데
올 해 읽어야 할 책 중 세 권을 내게 선물한 것이다.
책을 건네며 K는
책을 읽는 것이 치매 예방에도 좋다는 미끼를 끼워 넣었다.
사실 내가 책에서 손을 놓은 건 15 년 정도 되었다.
노안이 오면서
잠 드는 순간까지도 손에서 놓지 않았던 책이
점점 멀어지게 된 것이다.
어릴 적부터 '아는 것이 많다'는 칭찬을 들었고,
그 칭찬에 걸맞게 살기 위해서
눈을 혹사할 정도로 무자비하게 책을 읽던 시절도 있었는데
그런 열정의 시간이 노안 때문에 허무하게 사라지게 되었다.
책을 읽지 않아도 사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었고
지금까지도 멀쩡히 생명을 유지하고 있음에도
늘 마음 속에 책에 대한 연모의 불씨가 꺼진 적은 없었다.
가끔 책에 대한 연정 때문에
겉장을 열기는 하지만 몇 페이지 넘기다 보면
눈이 침침해지고 글자가 너울거리며 아지랑이처럼 춤을 추는 것 같아
이내 덮어 버고 만 것이 어디 한 두 번이었던가.
연모하는 여인을 엿보기만 하다가
말 한 마디 건네지 못 하고
떠나 보내는 것 같이 허무해서
아예 책과는 인연을 끈다시피하며 살아 왔다.
'무식하니 겸손해진다'라는
아주 좋은 핑계거리 하나도 장만한 채
책과는 연을 끊고 편안한(?) 삶을 살던 나에게
K가 준 책 세 권은 새로운 도전을 일깨워 주었다.
사모했던 여인을 다시 만나서
내 연정을 고백하고
다시 소중한 연을 이어갈 수 있을까?
K가 책을 건네며 했던 말 중,
책이 치매 예방에 좋다는 게 그 날 내게는 달콤한 유혹이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음식점에 들어가기 위해 등산화를 벗어야 했는데
한 쪽 신의 끈을 풀고는
풀지 않은 쪽의 신을 벗으려고 애를 썼던
방금 전 일이 떠 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런 치매 현상은 생활 현장 곳곳에서
전방위적으로 일어나는데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자면
세탁소 냉장고 위에 있는 전자 레인지에 음식을 데운 후
레인지 아래 있는 냉장고 문을 열고 한참을 동안 찾은 경우가
그 많은 예 중 하나이다.
치매 증상의 심각성이 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데
K의 한마디는 막힌 혈을 뚫어주는 침 한 방과 같았다.
책을 읽으면
잃어버린 연모의 정이 되살아남은 물론,
치매 예방까지 할 수 있다는데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런데 세 권의 책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미국으로 돌아 오는 비행기 안에서
책의 무게보다도
그 세 권의 책을 읽어야 한다는 마음의 부담 때문에
비행기가 추락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런데 "책 읽고 독후감 써서 보내!"라고 한 K의 속내는
아마도 친구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책에 대한 사랑의 회복과 아울러
마음과 영혼의 건강함을 잘 지키라는 마음을 담아
책을 선물한 것이었을 것이다.
아무렴 친구가 책에 담아 주는사랑의 마음이
부담감의 무게보다 가벼울 수 있을까?
K는 독후감을 쓰라며 속으로 이렇게 말 하는 것 같았다.
"이 것 저 것 따지지 말고 일단 약부터 먹어."
책에 대한 내 옛 사랑을 회복하는 약,
치매를 예방해 주는 약.
그 친구는 좋은 약은 몸에 쓰다는 말도 했다.
오늘 아침에도 나는 시차 때문에 일찍 눈을 떠야 했다.
숙면을 하지 못 해서 눈이 아릿거리긴 했지만
친구의 사랑에 힘 입어
어제에 이어 오늘 새벽에도
나는 경건히 그가 선물한 책장을 여는 것이다.
마치 15 년 전 헤어진 여인을 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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