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소에서 생긴 일 - 선물하는 것은 선물 받느니 보다 행복하니라
나에겐 특별한 능력이 있다.
한 동안 세탁소에 발길이 뜸한 손님을 머리에 그리면
신기하게도 그 손님과 당일 아니면 그 이튿날에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지난번에도 아내와 산책을 하며
손님 중 누군가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그 손님이 내 시야와 기억에서 멀어진 것이
두 해가 넘었다.
그 친구가 세탁소에 나타날 확률이 거의 없었음에도
내가 그 친구를 머리에 떠 올리고
그 이야기를 아내에게 건네자
그 이야기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그다음 날 짜잔 하고 세탁소에 나타난 것이었다.
그런 경우가 어디 한 두 번이라야 말이지
자주 그런 사태가 발생을 하니
이건 우연도 아니고, 그렇다고 기적이라고 하기도 뭐하고
그저 그렇고 그런 일상이 되어 버렸다.
Brunner라는 친구가 세탁소에 얼굴을 나타낸 것은 1 년 전 쯤이었다.
젊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머리에 숱이 없어서 얼마나 반들거리고
반짝반짝 윤이 나는지
한 번 쓰다듬어주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이다.
서글서글한 표정에 친근감을 감추지 않고
사람 좋은 미소를 간직한 젊은이였다.
이 동네 아가씨와 눈이 맞아 미국으로 와서 살고 있는데
스위스 영사관에 근무를 하고 있다.
그런데 한 달 동안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매 주일 세탁소에 들려 옷을 맡기고
자기의 근황을 물어보지 않아도 술술 부는데
그가 보이지 않으니
은근히 신경이 쓰이는 것이었다
두어 주일 얼굴을 보지 않으니 그냥 또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일상의 굴레 속에서 살다가
어제 뜬금없이 그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그냥 그러려니 했다.
나의 초능력이 늘 나타나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그런데 드디어 오늘 오후 반짝이는 머리가 세탁소에 등장했다.
내가 그를 볼 때는 얼굴의 눈보다도
머리에 우선순위를 두는 데
혹시 기적적으로, 아니면 의술의 도움을 받아
어떤 변화가 있을까 해서다.
그러나 그의 머리와 미소, 그 어느 곳에서도
변화의 조짐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평소대로 세탁할 옷과 더불어
오늘은 초콜릿 한 박스를 내어 놓았다.
"스위스에 다녀왔어요."
-아, 그래서 뜸했구나.-
어떤 영리적인 음흉스러운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이 친구는 그냥 만나서 같이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맑아지는
그의 고향 스위스 같은 사람이다.
정말 반가웠다.
한 달 동안 보이지 않은 이유가
고향 방문인 것이 다행이었다.
앞으로 또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스위스가 초콜릿으로 유명하니?"
그는 초콜릿과 치즈가 유명하다고 했다.
"그래?"
나는 스위스 치즈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니 초콜릿도 별 볼 일이 없을 것 같다는 선입견이 들었다.
그래도 나는 그가 다시 내 생활권에 들어온 것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초콜릿 한 박스에 담긴 그의 달콤한 마음을 맛볼 수 있어서 행복했다.
그러고 보니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손님 몇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중 하나가 Camacho라는 이름을 가진
아주 잘난 친구가 있었는데
Madison Square Garden 안에 있는 유명인들 사교 클럽의 매니저로 일을 했다.
그는 연말이면 자기 아들을 대동하고는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그들 부자의 손에는 와인이 들려 있었다.
자기가 자주 가는 가게에 와인 한 병 씩을 선물하기 위해서였다.
가게에서 오히려 좋은 손님에게 선물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 친구는 자기가 편리하게 물건을 구입하고 서비스를 받을 수 있으니
자기가 물건을 구입하는 가게에 선물을 전달하는
역발상을 한 것이다.
따지고 보면 선물을 할 때
선물 받는 사람의 마음을 생각하면
주는 사람의 마음이 먼저 기쁨으로 그득 채워진다.
그것이 선물의 속성인 것 같다.
물론 그 친구가 나이 먹고 은퇴를 한 뒤에는
그의 아들이 그 일을 이어서 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10여 년 전에 텍사스로 터전을 옮겨서
더 이상 볼 수는 없지만
그의 기억은 언제 떠 올려도 늘 새롭고 선명하다.
내가 비록 와인도, 초콜릿도 좋아하지 않지만
그들에 건넨 선물은 두고두고 내 안에서
사라지지 않고 기억될 것이다.
그들의 선물이 기억날 때마다
나도 누군가에게 선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래오래 기억의 칠판 위에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는,
그래서 그 선물을 받은 사람의 마음이 따뜻해지는,
그런 선물을 하고 싶다.
유치환의 시 '행복'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니라."
그 구절을 이렇게 바꾸어도 좋을 것 같다.
'선물하는 것은
선물 받느니 보다 행복하니라."
내일 느닷없이
텍사스로 이사 간 Camacho가 세탁소 문을 밀치고 들어올 것 같다.
https://blog.daum.net/hakseonkim1561/2157#n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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