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 아들 효자 만들기 프로젝트
하나,
둘 ,
셋.
딱 거기까지----였다.
작년 가을, 옷걸이에 낯 선, 그러나 제법 매력적인 셔츠가 하나가
눈에 띄어서 입어 보았는데
두 팔을 집어 넣는 데까지는 별 어려움이 없어서
내심 횡재를 했다고 생각하며
단추를 끼기 시작했는데
웬걸, 단추 셋을 끼고 나니
네 번 째 단추는 자기 짝꿍 단추 구멍과 너무 먼 거리에 있어서
더 이상 아래로 진전이 불가능 했다.
나랑 체형이 비슷한 막내 아들의 셔츠가 분명했다.
명치 밑으로 해서
나의 위장이 위치해 있는 지점부터 그 아래까지
더 이상 단추는 그 기능을 상실해 버린 것이다.
힘을 주어서 배를 들이 밀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마치 나오다 멈춘 재채기처럼
아쉬움을 남기며
셔츠를 벗어 다시 옷걸이에 걸어 두는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빨간 색과 파란 색, 그리고 흰 색의 체크 무늬의
그 셔츠는
로맨스 그레이의 세대로 접어든 나에게
입어서 맞기만 하면 회춘이라도 할 것 같은
강렬한 유혹의 눈길을 내게 보냈지만
썸만 타다가 허망하고 맥 빠진 결론을 맺고 말았다.
셔츠에는 H&M 브랜드 상표가 붙어 있었다.
비교적 싼 가격에 디자인이나 품질도 무난해서
특별히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있는 제품이다.
그런 까닭인지 셔츠는 남자를 위한 것임에도
젊은이들 취향에 맞게 허리가 잘록하게 패여 있었다.
문제의 셔츠 허리는 패여 있고
내 허리와 배는 D자 형태를 하고 있으니
그 셔츠는 내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다.
단추 셋.- 내가 부르다 죽을 이름 단추, 셋.
회춘이고 뭐고 현실 앞에서
속이 상했고, 시간이 원망스러웠다.
그래도 미련이 남아
늦가을과 겨울엔 단추 셋만 채우고
그 위에 스웨터를 입고 다녔는데
칼라만 스웨터 밖으로 살짝 나왔어도
제법 맵시가 나는 것 같았다.
누군가 스웨터를 벗어 보라고 하면 낭패도 그런 낭패가 없을 것 같았다.
이런 내가 우습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해서
두어 번 입고 그만 두었다.
그리고 언제가 그 셔츠를
내 것(?)으로 만들고 말겠다는,
아주 묽은 미음 같은 마음을 먹었으나
곧 잊혀지고 말았다.
그런데 사단이 났다.
올 초에 지인들과 서부 여행을 다녀와서
몸 무게를 달아 보았는데
눈금이 무려 73kg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내 키에 73 kg은 과체중이 분명했다.
아닌게 아니라 언제부터인지 축구를 할 때
배와 허리 뒤 쪽으로 극심한 살의 떨림 현상이 나타나고
있음이 머리에 떠 올랐다.
지난 겨울 친구 어머니 상에 가려고
몇 벌 되지도 않는 양복을 다 꺼내 입어 보았는데
허리가 작아서 입을 수 없었던 기억도 되살아 났다.
긴급조치건 계엄령이건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상황이 도래한 것이었다.
게다가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그 매혹적인 셔츠는 여영 내게서 영영 멀어져 갈 것이 뻔한 일이었다.
우리 아이들에게 배운 다이어트를 실행에 옮겼다.
먹는 양은 줄이지 않고
오후 한 시에서 일곱 시 사이,
여섯 시간 동안에만 음식을 먹는 방법인데
제법 효과가 있는 것 같다.
물론 아침에 아내 혹은 아들이 만들어 주는
케일과 여러 과일을 섞어 만든 스무디를 마시기는 한다.
저녁 식사 후에 바로 소파에 등을 기대고 tv를 보거나
음악을 듣다가 바로 잠자리에 들던 생활 방식을 바꾸어
동네 공원을 잰 걸음으로 산책을 한다.
그리고 근력 운동이 다이어트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팔굽혀 펴기를 시작했다.
처음엔 한 번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이제는 다섯 번 씩 다섯 번, 스물 다섯 회를
아침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씩 한다.
팔굽혀 펴기를 했더니
오랫 동안 아파서 고생을 했던
왼 쪽 어깨의 통증이 스르르 없어졌다.
(한가한 시간에는 세탁소 바닥에 요가 매트를 깔고 하기도 한다.)
그렇게 규칙적인 생활을 하면서
몸도 가벼워지고
삶에도 풀 먹인 면처럼 생기가 돋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달 반의 시간이 지났다.
몸무게는 65kg에서 67 kg 사이를 오락가락 한다.
8-9 kg이 빠진 것이다.
어느날 문득 썸만 타고 끝났던
그 셔츠 생각이 났다.
한 때 마음에 두었던 여인을
우연히 만난 것처럼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셔츠에 팔을 넣고
단추를 끼우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그리고 넷 , 다섯, 여섯 개의 단추를
막힘 없이 단추 구멍에 넣고 끼웠다.
힘 주어 배를 들이 미는 노력 없이도
셔츠는 내 몸에 착 감겨들었다.
손주들에게
"I love you, 하버지."라는 말을 들을 때처럼
기쁘고 설레고, 또 감격스러웠다.
나를 닮아서
무심하고 불친절하고 무뚝뚝한 막내 아들이
깜박 잊고 집에 두고 간 셔츠 때문에
나는 나의 몸과, 삶에 필요한 생기를 되 찾았은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다.
아무리 그 셔츠가 맘에 든다고는 하나
노골적으로 냉큼 입었다가
아들에게 자식의 옷을 몰래 가져간
파렴치한 아빠라는 낙인이 찍힐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꾀를 내었다.
모처럼 만에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서
두고 간 셔츠 때문에
아빠가 날씬해 지고 건강해졌다는 말을 막내에게 전하기로 했다.
그럼에도 셔츠가 제 것이라고 우기면
째째한 아들에 더해서 파렴치한 아빠가 될 것이고,
그냥 아빠 입으라고 순순히 포기하면
통 큰 아들에 효자 아들이 되는 것이니
현명한 아들이 잘 판단해서 대답할 것이다.
셔츠에 붙어 있는 H&M이라는 상표가 다시 눈에 클로즈 업 되어 들어 온다.
-아빠가 Healthy(건강하고)하고 , Happy(행복하게)하게
그리고 Merry(즐겁게)하게 살라고
아들이 일부러 이 상표를 골라
내 옷걸이에 걸어 둔 것은 아닐까?-
그 셔츠에 아빠의 몸을 맞추면
건강하고 행복한 삶이 될 거라는 그런 수수께끼.
수수께끼를 풀고서야 비로소 H&M에 담긴 의미가 살아 났다.
어여쁜 셔츠 하나 생겨서 좋고
효자 아들까지 두었으니
이 또한 삶의 기쁨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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