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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저녁 산책

어제 오후, 

아내는 막내 아들이 뉴저지 남 쪽 어딘가에

연주차 왔다는 소리를 듣고 

밥 한끼라도 해줘야 한다며 떠났다.


밀린 공부를 하느라 집에 남아 있던 

큰 아들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이렇게 둘이 먹는 저녁도 얼마 남지 않았다.


7 월 중순 뉴욕 주 변호사 시험이 끝나고 나면

꽤 오랜 시간 동안 여행을 하고

돌아온다고 했다.


여행에서 돌아와서는

머지 않아 집을 떠날 것이고

서로 간절히 원하지 않는 한

우리 둘만의 식사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날은 흐렸고

흐린 하늘에 구름이 점점 짙은 묵 색으로 어두워져 

가벼운 빗방울이 하나 둘 날렸다.


카메라를 들고 산책길에 나섰다.


아내와 같이 걷는 길인데

혼자 걸으니 

눈여겨 보는 사람도 없는데도 공연히 어색하고 쑥스럽다.


낮에 보는 사람은 손님으로 보이는데

같은 사람들인데도 

밤에 보니 동네 이웃으로 여겨진다.


아무런 굴레에 씌워지지 않느다는 건 

얼마나 복된 일인가.


노동의 굴레가 벗겨진 밤의 자유로움에

발걸음도 가벼워진다.


비가 와도 좀 맞으면 그 뿐.


축축한 불편함보다는

자유가 낫기 때문이다.

(비는 오지 않았다.)




우리 아파트와 같은 블락에 있는 야채 가게.

나는 이 곳에서 6 년을 일 했다.

그 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리고 벗어난 곳이 몇 건물 지나서 세탁소.

그 곳에서 28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다시 갇히기 위한 탈출.


따지고 보면

살아 있다는 것이 수인의 신분이라는 말과 같다.

지구에 갇힌 수인.


결국 죽을 때까지

자유를 꿈꾸도록 운명 지워진 것이 아닐까?


시지프스의 슬픈 운명 같은---




우리가 사는 아파트 빌딩.






작은 공간  안에서 일하는 청년.

그가 만드는 음식이

누군가의 허기를 달래 줄 것이다.


고향을  떠나온 저 아라 청년도

분명 허기를 느낄 것이다.


30 년 넘게 이 곳에서 살아도

여전히 나를 떠나지 않는 허기.







차 주인에게 필요한 5천 5 백 달러.

그 돈만 있으면 정말 행복할까?



작은 공원 안의 온실엔

저녁이면 불이 켜진다.


식물들도 잠을 자야하는 것 아닌가?


식물들에게서 휴식의 자유를 

사람 뜻대로 빼앗어도 되는건가?







내 그림자.



수 많은 창문은 같은 모양,

같은 크기여도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다 다르다.



전깃줄에 매달린 운동화 한 켤레

땅에 있어야 할 것이

공중으로 유배를 갔다.


운동화는 땅을 그리워할까?



누군가가

자전거 바퀴를  망가뜨렸다.


매어 있는데

불구가 된 몸


자전거


스스로 움직이지 못 하는데 이름만 그렇다.


모순 덩어리



여기도 배달의 민족.


배달의 민족에겐

오히려 밤이 감당하기 힘든 굴레가 된다.




아이들이 떠난 공원 안의 놀이터


이 곳의 정적이 더 크게 들리는 것은

낮에 그만큼 더 시끄러웠기 때문일 것이다.




저 나뭇잎은 주기적으로

색깔이 변한다.

빨강

주황

초록




교차로.


두 방향이 일치할 때가 없는 운명.





작은 화단의 꽃






한 바퀴 돌아 왔다.


전철이 섰다 지나가고---


역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의 발은 참으로 분주하다.

하루의 끝에서

쌓인 피로를 빨리 털어 버리고 

무거운 육신을 눕히고 싶을 것이다.


노동과 휴식,

그리고 그 끝에 올 수면.

언젠가 내 삶의 끝에 찾아올 아주 긴 수면.


그러고 보면

매일 매일이 죽음의 연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