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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나의 음악 이야기 - 그대의 찬 손



나의 음악 이야기 - 그대의 찬 손


오늘도 저녁을 먹고 아내와 함께 

동네 공원 다섯 바퀴를 걷고 돌아와

턴 테이블에 LP  판 한 장을 올렸다.


푸치니의 '라 보엠'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 하모니와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주인공 로돌프 역을 맡아서

함께 녹음을 했는데

이 정도면 세상에서 최고의 조합이라고 해도 시비걸 사람은 없을 것 같다.


한창 때의 파바로티가 부르는 

'그대의 찬 손'을 듣고 있으려니

그저 가슴이 떨릴 정도로 깊은 감흥이 몰려 온다.


옆 방의 미미가 불을 빌리러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촛불은 꺼지고

어두운 방에서 열쇠를 떨어뜨리자

열쇠를 찾으려 바닥을 더듬거리다 서로 마주 잡은 손.

불기 없는 추운 방,

차가운 손이 만나고

그렇게 시리고 아픈 사랑은 시작된다.


그 때 미미의 찬 손을 잡고 로돌프가 부르는 아리아

'그대의 찬 손'은

수 많은 아리아 중의 백미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 중 파바로티가 부르는 노래는 정말 세계 최고라고 말하는데 

조금도 주저함이 없을 정도다.


그런데 이 판이 어디서 났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보통 판 한 장 한 장마다

그 곳을 샀거나 얻었던 기억들이

음악들과 함께 내 머리에 저장되어 있는데

이 판은 전혀 기억의 폴더가 비어 있다.


가난한 연인들의 아픈 사랑 이야기.


라 보엠은 물질적으로 아주 가난했던 젊은이들의 

슬프지만 아름다운 이야기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물질적인 가난도 가난이지만

정신적이고 정서적인 빈곤 때문에

내 사랑하는 연인의 손이 얼마나 차가운지 모르고

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다.


마주 잡은 손이

가난 때문에 차가웠지만,

마음만은 따뜻하고 견줄 수 없이 아름다웠던

로돌프와 미미의 비극적인 사랑 노래는

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십 수년 전,

퍽퍽한 가슴으러 살던

내 버젼의 '그대의 찬손'을 소개한다.


그대의 찬손

여보!, 사랑하는 나의 신부, 나의 누이, 나의 어머니여.
얼마전 오페라 ‘라 보엠’ 중에 나오는
‘그대의 찬 손’이라는 아리아를 들으며 당신을,

그리고 당신의 손을 생각했습니다.

유난히 추위를 많이 타는 당신의 손을 감싸 내 코트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신혼의 겨울이 생각나요.
내 주머니 안에 있는 당신의 작고 앙증맞은 손을 녹여주며
눈길을 밟고 다녀오던 매일 아침미사,
그 겨울, 그 사랑을 생각하니
마치 벽난로에 불을 지핀듯이 가슴이 따뜻해오네요.
그런데 그때는 당신의 손이 그렇게 차가운 줄 몰랐어요.
아니, 당신 손을 잡고 있다는 행복감 때문에
내 손의 감각이 그리 무디었는지도 모르죠.

그런 행복도 잠깐,
그 겨울과 작별하며 당신도 미국으로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돌아온 또 하나의 겨울은 왜 그리도 춥던지요.
내 코트 주머니는 너무나 헐렁하게 느껴졌고
휑하니 찬 바람만 출렁이는 것 같았어요.

당신과 헤어진 지 일 년 후
나도 당신과 함께 미국 뉴욕땅에서
새롭고 낯선 삶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도착한 다음날부터 시작된 이민의 삶의 무게는
왜 그리도 버겁던지요.

우리의 꿈과 사랑을 서로 꺼내서 나누며 이야기할 여유도 없이
시간은 택시의 미터기처럼 털커덕 털커덕
그렇게 쉽게, 그리고 무심하게 지나갔습니다.

어느새 우리 사이엔 아이들이 다섯이나 생겼고,
나는 가장으로서의 의무때문에,
그리고 당신은 아내나 연인으로서가 아니라
엄마로서의 역할을 하느라 더더욱 정신없이 살았지요.

쳇바퀴를 도는 다람쥐는
아마도 아무 의식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생각할 능력과 여유가 있다면
그렇게 고단하고 힘든 일을 계속할 수 없을 거예요.
우리의 삶도 아마 그랬겠지요.

삶의 여유가 있었더라면,
그래서 생각할 시간이 주어졌더라면
벌써 미국생활을 접어버렸을지도 모르지요.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라고 숨 돌릴 여유가 되어서야
비로소 당신을 바라볼 수가 있었습니다.
당신의 눈 가엔 세월의 나이테가 비치더군요.
아!, 그리고 당신의 손------
엣날 생각으로 잡아본 당신의 손때문에 깜짝 놀랐지요.
마치 낯선 사람의 손 같았으니까요.

당신의 손은 내 손 안에 들어오기엔
너무나 투박하고 커져 있었습니다.
당신 말로는 아이 다섯을 낳느라
뼈가 온통 늘어나서 그렇게 되었다고 했지요.

차고 매력이 없어진 당신의 손을
다시 쥐고 싶다는 생각이 없어졌습니다.
그래도 가끔은 당신의 손을 잡아볼라치면
슬그머니 손을 빼는 당신을 바라보며,
세월이 가면서 우리의 사랑도 빛바랜 사진처럼
그렇게 퇴색되어가는 것 같아 가슴이 아릿아릿해졌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그대의 찬 손’을 들으며 생각했지요.
사랑은 사랑을 넘어설 때에만 진정한 사랑이라는 걸 말이죠.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내가 당신의 손을 잡으려 할 때
당신이 슬그머니 손을 뺀 것은 나를 거절하려는 것이 아니었음을 말입니다.
오히려 당신은 차고 투박해진 손 때문에
미안해 했던 거죠.

여보, 미안하고 부끄러운 건 당신의 손이 아니라
당신의 손보다도 더 차고 투박한 나의 마음입니다.

이제사 알 것 같아요.

진정한 사랑이란 작고 따스한 손 뿐만 아니라
오히려 차고 투박한 손까지도 감싸주고 녹여주며,
입까지도 맞추어야 함을 말입니다.

지천명의 나이가 된 지금에서야
사랑은 사랑의 껍질을 깨어야 비로소 진정한 사랑이며,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 하늘의 명임을 깨닫습니다.

--------

그리고 어제 저녁 함께 기도하기 위해 잡은 그대의 손은
'그대의 큰 손'이 되어 있었습니다.
작은 손으로는 작은 양 밖에 나누어 줄 수 없어서
크게 진화한 그 대의 찬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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