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미한 옛 추억의 그림자 (부록 3)
항공 의료원 가는 길 초반, 즉 문방구 사거리부터
학교 관사까지만 내 머리 속에 희미하게 남아 있고
그 이후의 지리적 거리는 다 사라져 남아 있지 않다.
얼마를 걸어서 갔는지,
항공 의료원은 어떻게 생긴 건물이었는지도
기억에 없다.
확실한 것 하나는
우리 학교가 제일 기깝다는 사실이었다.
지방애서 기차를 타고 올라온 학생들도 있었으니 말이다.
항공 의료원에서는 대충 세가지 일정을 소화 했는데,
처음에 신체 검사,
신체 검사가 끝난 뒤에는 비행 훈련,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자회견 연습 등이었다.
그런데 처음 신체 검사에서부터
나는 매끄럽지 못 했다.
뭐 내 신체가 비행기 타는 데 큰 장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신체 검사라고 해서 난 처음에 학교에서 하는 신체검사 정도로
쉽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나 같이 눈 좋은 사람은 신체검사에서 시력검사는
그야말로 앉아서 떡먹기였다.
장학퀴즈에서 척척 답을 맞출 때처럼
괜히 어깨가 으쓱해지기도 했다.
눈이 그리 좋은 것도 다 내가 잘 나서 그렇다고 생각할 때였으니
안과의 시력 검사는 그야말로 나의 우수성을 입증하는 기회였다.
내가 전에 언급한 나의 능력인 스캔, 그리고 저장을 활용하지 않아도
나의 시력은 출중했다.
그렇게 좋던 눈에 노안이 오자
가까운 글씨는 잘 보이지 않는다.
돋보기를 쓰고 책을 읽어도 쉽사리 눈이 피곤해져서
10 여 년전 부터 책을 읽지 않는다.
책을 읽지 않으니 무식하기는 해도
무식한 겸손함을 체득했다.
책을 많이 읽어 유식한 사람들을 보면
저절로 칭찬을 하게 된다.
"어떻게 그런 걸 다 아세요? 대단하세요."
상대방은 나의 칭찬에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 간다.
남보다 유식하기를 포기한 까닭에
나보다 유식한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게 되는 것 같다.
내가 유식하다고 생각할 때 보다
무식해진 뒤에 더 많은 친구가 생기는 것 같다.
육체의 눈이 어두워지면서부터
마음의 눈, 즉 심안이 밝아지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평생을 난 공자님 말씀대로 살지 못 했다.
열 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지 못 했으며
나이 서른이 되어도 스스로 서지 못 했고
마흔엔 세상 일에 혹해서 천지 구분 못 하고 살았다.
오십에도 하늘의 명이 뭔지 몰랐다.
그런데 이순의 나이가 되니
공자님이 말씀처럼 귀가 조금은 순해짐을 느낀다.
귀가 순해진 것은 아무래도 눈이 어두워지면서 부터
책을 읽지 않고 무식해진 까닭인 것 같다.
아는 게 없으니 할 말도 없고
누구와 내가 맞느니, 네가 틀리니 하고 논쟁할 필요가 없어졌다.
보이지 않으니, 잘 듣게 되었다.
남의 말을 잘 듣다 보니 남을 좀 더 이해하게 되었다.
하나를 버리니
다른 세상이 열렸다.
이런 저런 신체 검사를 한 끝에
마지막 과정으로 한 군의관 앞에 서게 되었다.
"빤쓰 내려!"
나보다 앞 서 있던 친구들은 모두 군의관이 시키는 대로
빤쓰를 내리고
빤쓰가 가리고 있던
신체의 앞과 뒤를 군의관에게 까발려야 했다.
맨 뒤에 서 있던 나는 가슴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수줍음이 많았던 나는 콧수염이 나면서부터는
어릴 적에 할아버지와 동무해서 가던
목욕탕에도 혼자 갔다.
그것도 일 년에 한 두번이 고작이었다.
우리집 화장실실에서 더운 물 받아 놓고 대충 몸을 씻었다.
드디어 나의 차례가 도래했다.
"빤쓰 내려!"
우리가 어릴 때는 최후의 속옷을 빤쓰라고 했다.
조금 세월이 지나 팬티라는 고상한 단어가
빤쓰와 뒤섞여 쓰이기 시작했다.
팬티라고 하는 사람은 빤쓰라고 하는 사람보다
더 교육을 받고 고상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빤쓰'는 영어 단어 'pants'에서 온 것 같은데
pants의 원 뜻인 바지와는 굳이 관계가 없다고는 못 하겠으나
최후의 속옷인 panty와는 거리가 아주 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빤쓰의 어원이 무엇인지 아는 분 가르쳐 주시길)
빤쓰란 말이 그렇게 가슴 뛸 정도로 두려운 말인지
그 때까지 자는 진정 몰랐다.
"내릴 것인가 말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그것은 내 존재의 문제 만큼 절박했다.
나는 침묵했다.
"빤쓰 내려!"
군의관이 재차 다그쳤지만 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전투기 타기 위해 숫총각의 몸을 보이는 것은
절개를 버리는 것과 같다는 비장한 생각이 들었다.
"정말 안 내릴 거야?"
군의관의 짜증 에 화가 반 섞인 말이 튀어 나왔다.
"안 내릴 겁니다."
절개를 지키기 위해
나는 어떤 희생도 치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의 단호한 어투에 군의관은 당황한 표정이 뚜렷하게 얼굴에 드러났다.
그는 피식하고 웃더니
자기가 졌다라는 펴정으로
내 빤쓰 벗기기를 포기했다.
그 군의관은 군 생활 하면서
수 많은 장정들의 빤쓰를 내리게 했을 것인데
내 빤쓰 내리기만 실패 했을 것이니
그 날은 그에게 치욕의 날로 길이 기록되지 않았을까?
내가 팬텀기를 타지 못 한 것은
그 군의관이 나를 못 마땅하게 생각해서
신체검사에서 최하위 등급을 준 까닭이라고 생각했다.
그 때 나는 또 하나 강자를 이겼다고 생각했다.
사실 빤쓰 속의 신체 앞 뒤는 배설 기관이다.
배설기관의 정상 유무가 비행기 타는 것과
그 무슨 대단한 상관관계가 있는지 모르겠다.
그 뒤로 비행기를 여러 차례 탔어도
빤쓰를 내리라는 요구를 받아 본 적이 없다.
신체검사 뒤엔
전투기 탑승 훈련을 했다.
모형 비행기 안에 들어가 낮은 기압을 견디는 체험이며
전투기 조종사들이 쓰는 반짝이는 헬멧을 쓰고
서로 교신하는 연습도 했다.
마지막으로 사고가 생기면 비행기에서 탈출하는 훈련도 했다.
좌석 어딘가의 단추를 누르면
비행기의 해치(유리문)가 자동으로 열리면서
의자가 밖으로 튀어나가게 설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낙하산이 자동으로 펴진다고 했다.
여간 폼 나는 일이 아니었으나
그런 상황은 일어나서는 아니 되었다.
마지막으로 공군 정훈 장교가
비행기를 타고 비행이 끝니고 나면
기자회견이 예정되어 있는데
그에 대처하는 모범 답안을 알려 주었다.
비행기 시승에 대한 소감을 물으면,
"정말 뛰어난 전투기를 보유한 우리 공군의 전투력으로
북한 괴뢰군을 무찌를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우리 학생들이 정성스럽게 모은 페품으로
이런 전투기를 보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 기쁘고 보람이 있습니다."
라고 대답하라고 정훈장교가 말했다.
결국 나는 비행기도 타지 못 했고
더더군다나 기자회견을 할 기회도 없었다.
팬텀 편대가 서울 하늘을 낮게 비행할 떄
쓰린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그 때 나는 전투기 탑승하는데도
뭔가 비리가 있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나같이 '정의감이 투철한' 사람에게
비행기를 태워주지 않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라는 상념에 빠졌고
나를 알아주지 않는 사람들과 국가에 대해 절망했다.
그것은 국가가 정의롭지 못하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그리고 신체검사를 하면서
내게 "빤쓰 내려"를 강요했던 군의관에게 묻고 실었다.
"도대체 제게 왜 그러셨어요?"
"넌 내게 모욕감을 줬어."
영화 달콤한 인생이었던가?
조직의 중간 보스 이병헌과 보스 김영철 사이의 대사에서 처럼
내가 빤쓰를 내리지 않아 앙심을 품은 군의관 때문에
나는 비행기를 탈 수 없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겐 지병이 있었다.
최근 몇 년 전에 알게 되었는데 바로 축농증이다.
안 면 바로 코 뒤에 부비동이라는 공기 주머니가 있는데
둘 사이의 소통이 잘 일어나지 않음으로 인해서
두통같은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내 오랜 두통의 원인인 축농증은 비행기 탐승 실습 때 나타났다.
비행기의 고도가 높아지고
기압이 낮아지면서 투통이 시작된 것이다.
모형 비행기 안에 들어가기 전에
교관이 설명했다.
사람마다 다르긴 해도 기압이 낮아지면
고통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고통의 강도를 셋으로 나누어
아파도 참을 수 있으면 손가락으로 하나를 표시하고
많이 아프면 둘, 도저히 견딜 수 없으면 3으로 표시를 하라고 했다.
나는 견디다 못 해 엄지와 검지로 둘을 표시했다.
결국 나는 일반 비행기는 탈 수 있어도
높은 고도에서. 그리고 급박한 기압의 변화에 견딜 수 없는 체질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보다 전투기에 탑승하기에
더 적합한 신체조건을 가진 다른 학생들이
기회를 갖는 것이 바른 일이었음을 얼마 전에야 깨달았다.
정의감이 뛰어나다는 조건 하나로는
전투기를 탈 필요충분 조건이 되지 못한다는 점을 깨달은 것이다.
질풍노도의 시절을 지나오며
속 빈 강정 같은 내가 참 오만하게 살았다.
그러니 내겐 친구가 없었다,
내게 가까이 오려 해도 내겐 찬 바람이 일었다는 친구의 말을
이젠 받아 들이고 수긍한다.
나 참 까칠했음을 고백한다.
내가 참 별 볼일 없는 사람임을 들여다 볼수 있도록
육신의 눈이 나빠진 것이
얼마나 댜행인지 모르겠다.
이젠 친구들이 내게 오기 전에 냐가 먼저 다가간다.
나를 버리니 친구들이 생긴다.
공자님 말씀대로 이순에 접어든 내 나이,
정말 귀가 순해진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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