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미한 옛 추억의 그림자 (부록 2)
언제 쯤. 어느 계절에 항공 의료원으로 갔는지는 전혀 기억에 없다.
학교 수업이 이루어지고 있던 어느 날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공군 본부 뒷담길을 따라 걸어 가는 길은
아주 한적해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공식적으로 수업 중에 '찡'을 지참하고 교실을 나와
당당한 걸을걸이로 백주 대낮에
학교 문을 나설 때의 느낌은
군대 시절 정식 휴가증이 있으면서도
시외 버스에 올라타 '찡' 검열을 하는 헌병의 눈초리와 맞닥뜨릴 때와 비슷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 학교 문을 지키시던
과도한 직업 정신 때문에 월권 행위를 일삼는
무시무시한 수위 아저씨와 조우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전설적인 카리스마의 수위 아저씨가 지키는 교문을 드날 때면
마치 사찰의 사천왕문을 지날 때처럼
비록 짧았어도 우리는 머리의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을 갖곤 했다.
(어릴 적부터 듣던 진부한 표현으로 옛날에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썼다.)
헌병들은 한결같이 화이바(헬멧의 고어)를 눈이 가릴 정도로 눌러 쓰고
시외 버스에 올라 탄 후,경례를 했는데
그 경례 동작은 육군 제식 훈련 FM과는 확연히 달랐다.
경례 동작이 아주 건방졌는데
헌병 나름의 FM이 따로 있었는지 아직도 궁금하다.
검문하는 헌병은목소리를 있는대로 깔고 "잠시 검문이 있겠습니다."라고 말하며
화이바에 눈을 반 쯤 감춘 채 사람들을 째려 보는데
눈빛에서 살기가 느껴질 정도로 싸늘했다.
우리 학교의 수위 아저씨는 다리를저는 분이었는데
중학생 들 뿐 아니라 구렛나루까지 짙어져
벌써 애 아버지 같은 외모의 고등학생들에게도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 분의 카리스마에 관한 소문은 선배들로부터 이어져
해마다 살까지 붙었다.
그런 까닭으로 교문을 지날 때면 저절로 옷깃을 여미며
몸과 마음의 상태를 가지런히 해야 했다.
오히려 선생님들보다 더 하면 더 한 카리스마로
교문을 굳건히 지키셨던 수위 아저씨의 권위를 생각하면
요즘 아파트 경비 하시는 분들의 처지는 참으로 딱하다고 밖엔 달리 할 말이 없다.
수위 아저씨와 학생들의 관계는
갑과 을로 규정하기엔 부족해도 너무나 부족하다.
갑을 병정무기경신 임계
이 10간중 처음인 '갑'과 9 단계를 더 내려간 마지막 '계'의 관계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 분은 그런 분이셨다.
교문 출입증을 제시했더니
수위 아저씨는 무슨 일로 교문 밖을 나서냐고 물으셨다.
그 분 앞에만 서면 나는 왜 그리 작아지는지.
학교 대표로 전투기 탑승 예비 후보로 뽑혀서
항공 의료원에 간다는 대답을 들으신 수위 아저씨는
내 어깨를 토닥이며 격려를 해 주셨는데
영광도 그런 영광이 없었다.
그 부드러운 카리스마는 수위 아저씨가 가진 또 하나의 모습이었다.
장원 급제해서 임급님을 알현하면 그 감격과 떨림이 그만할까?
학교에서 항공 의료원까지 걸어가는 길은
참으로 어색한 일들의 연속이었다.
벌건 대낮에 수위실을 통과하는 일부터 시작해서
수업이 있음에도 인적이 거의 없는 길을 혼자 걸어 가는 일,
그리고 처음으로 항공 의료원에서 신체검사를 받는일에 이르기까지
어색한 상황과 상황이 겹친 날로 기억된다.
항공 의료원에 모이는 시간이 몇 시였는지는 모르겠으나
한 명의 지각생도 없이 모두 정해진 시간 이전에
팬텀 전투기에 탑승할 후보자 10 명이 다 모였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전투기 탑승 후보자가10 명이었는데
모두 남학생이었다.
요즘 세대에 이렇게 남학생만 선발했다면
성차별이니 헌법 위반이니 하며
각계 각층에서 딴지를 걸고 한 바바탕 난리가 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때는 그랬다.
전투기는 남자나 타는 것이라는 생각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여학생들도 선발하자는 주장을 누군가 했다면
그 사람이 오히려 여론의 뭇매를 맞았을지도 모르는 시절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때부터 군대가 하는 일을 삐딱하게 보는 습관이 생겼는데
그것은 후보자 10 병의 학생이
전국 각지에서 선발되어야 했음에도
두 명은 서울의 중경 고등학교 출신이라는 사실에 근거한다.
중경 고등학교는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첫 졸업생을 배출한,
군이 재단의 주인인 학교였다.
군 자녀들을 교육하기 위해 설립된 학교로서
교복이 아주 폼이 나서
다른 건 몰라도 자격이 주어진다면
그 교복에 눈이 어두워서 지망했을지도 모르는 학교였다.
항공 의료원에 온 학생 열 명 중
중경 출신의 학생은 둘 다 아버지가 공군 고위 장교라는 걸
아주 뽐내듯 노골적으로 드러냈고
후문에 의하면 두 명은 모두 팬텀 전투기에 탑승하는 기쁨을 누렸다고 한다.
결국 나머지 세 자리를 놓고 여덟 명이 운명을 걸어야 했다.
명확한 증거는 없어도
군에서, 나라에서 하는 일에 대한 불신은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발 과정이 공평하지 않음을 눈치는 챘으나
나는 아무 말도 발설하지 않았다.
군대는, 그리고 군인은
우리 학교 수위 아저씨보다 훨씬 높고 무섭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비행기를 한 번 타고 싶은 마음에
입바른 소리 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괜히 그런 말을 우리 담임 선생님 앞에서 한 것처럼 했다가
비행기를 못 타는건 물론이거니와
군대식으로 폭행을 당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과 비겁함 때문이었다.
애초부터 신체검사 같은 걸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어불성설이었다.
이 번에 한국에 다녀 오면서도,
그리고 셀 수 없이 비행기를 타면서도
신체검사를 받아야 비행기를 태우겠다는 항공사는 없었다.
더군다나 우리가 탈 팬텀기는 서울 상공을
많은 시민이 볼 수 있도록
낮게 비행할 예정이었으니
마하의 속도로 날 필요도, 곡예 비행을 할 필요도 없었다.
평범한 사람에게는 누구나 기회가 주어질 , 그런 성격의 비행이었다.
나는 그 때부터 군대식에 대한 염증을 느끼게 되었다.
http://blog.daum.net/hakseonkim1561/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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