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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희미한 옛 추억의 그림자 5

희미한 옛 추억의 그림자 5


입으로 훅 불면 찬 기운이 나와 순식간에

세상을 겨울 왕국으로 변화시키는 마왕처럼 

몇 마디 툭 던져서 교실 전체를 얼음 상자를 만들고 담임선생은

자신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듯이 서둘러 교실을 빠져 나갔다.


모두가 얼어붙어 있는 동안

그 때만 해도 제법 영특했던 내 두뇌가

차르륵 차르륵 기름친 기어가 돌 듯 작동을 시작했다.


잠깐 동안 두뇌가 바쁘게 작동한 결과,

담임선생의 발언 배경이 출력되었다.


담임 선생은 전날 종례 시간에 

다음 날 폐품 수집을 할 예정이니

성심껏 집안을 뒤져 집 안에 있는 모든 폐품을 가져오라고 일렀어야 했다.


이미 이야기 했듯이 우리 담임선생은

섬세함이나 자상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대충대충, 덜렁덜렁


전 날 종례 시간도 대충 마무리 짓고 하루를 닫았다.

빈 병이나 헌 신문지나 잡지 같이 대수롭지 않은 것들이었지만

반공을 국시로 하던 그 당시 대한민국의 자주국방에

작은 도움이라도 될 수 있는 폐품수집에

한 개인의 불찰로 협조하지 못 함은

어찌 보면 커다란 매국일 수도 있었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이런 갸륵하고 희생적인 애국 행사를 게을리 했다는 것은

자칫 공안 당국의 눈에 띄었다면

크게 문제 삼을 수도 있는 사한이었다.


나는 담임 선생이 교실을 나가자 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비장하게 말했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아무도 아무 것도 할 생각하지 말아.

다시 말하지만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지금 생각해도 내가 아주 위대한 사람인 것 같은 생각에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나름대로 계산이 있었다.

담임 선생도 나를 함부로 할 수 없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것이 스스로 만들어낸 과대망상 이었을까?

그런데 40 년도 더 지난 지금 우리 반 친구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 하는 것 같다.

나의 위대함과 반 학생 전체를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 아무래도 과대망상이었음이 확실한 것 같다.


친구들은 반신반의 하는 투로

불안한 오전 시간을 보냈다.

모든 책임을 내가 진다고 하였으니 조금의 안도감도 있었을 것이다.

(그 때 내 말을 곧이 들었던 사람이 있다면 증언이 필요하다.)


드디어 기다리던 점심 시간이 돌아왔다.

담임 선생이 저승사자처럼 교실 문턱을 넘어섰다.


24 시가 지나고

아무런 희망이나 구원이 멈춘 25 시 속으로 

우리 모두는 빨려 들고 있었다.


담임선생은 장비처럼 교탁 뒤에 버티고 섰다.


"폐품 준비 했나?"


다시 교실이 얼음 상자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그 때 내가 손을 들었다.

긴장이 최고에 달한 순간이었다.


표면 장력.


나와 담임 선생 간에는 팽팽한 기싸움이 이미 시작되었다.

담임 선생의 손에는 장비의 장팔사모 같은 몽둥이가 들려 있었다.


"뭐야?"


나는 천천히 일어나 3.1 독립 선언문을 낭독하는 것처럼

위엄 있고 거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가 있는 교실은 신성한 성지입니다.

장래 우리 나라를 이끌어 나갈 초석들이 숨 쉬고 공부하며 

꿋꿋한 기상을 배우는 곳입니다.

그러니 그 어느 곳보다도 민주적이어야 할 교실이

담임 선생(님) 한 사람의 태만함으로 비 민주적인 전체주의 국가 같은

지경에 이르렀는데 그것을 어찌 비겁하게 우리 탓으로 돌릴 수 있단 말입니까?"


"만약 그것이 우리 학생 탓이라면 제 혼자 모든 책임을 질 터이니

저만 벌 해 주십시오."


내 60 평생 최고의 절정기를 꼽으라면

바로 이 순간이라고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는데

친구들 중 기억하는 이가 없다.

지금도 그 순간을 기억하면 우쭐해지고'

마치 혼자서 수 백 명의 적을 무찌른 것 같은

떨림이 온 몸을 스치고 지나간다.

(증언이 필요하다.)


이 번엔 담임 선생이 얼어 붙었다.

돌발 상황에 어찌 할 줄 모르며 허둥대는 표정이

담임 선생의 얼굴에 나타났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나는 그렇게 자진해서 교탁 앞으로 나가

담임 선생의 몽둥이에 장렬하게 순교를 하는 것이

나의 시나리오였다.

죽지 않게 맞고 나면 나는 친구들 사이에 영웅이 될 것이고

수난 가운데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 처럼

추앙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계산을 이미 끝낸 뒤였다.


교탁 앞으로 걸음을 떼려는 순간

한 학생이 손을 번쩍 들었다.


"또 뭐야?"


"선생님이 그러시면 안 되지요. 앞으로는 그러시지 마세요. 

최후 통첩입니다."


김인수는 내가 들어도 한 껏 부푼 풍선에 바늘을 들이 댄 것처럼

빈정대는 투로 한껏 담임 선생의 노기를 자극했다.


이 또한 돌발 변수였다.

내 혼자 모든 책임과 영광을 독차지 하려 했던

숭고한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기도 했다.


"김인수, 너 이리 나와."


김인수는 그 날 우리 반 모두의 희생제물이 되어서

복 날 개 맞듯이 처절하게 맞았다.

한 편 내가 맞으려고 했던 매를 대신 맞아 준 인수가 고맙기도 했지만

모든 영광과 흠숭을 나 혼자 받으려던 계획이

빛을 잃는 순간이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며

기억이 희미해졌다.


그 사건 때문에 내가 영등포 경찰서의 요주의 학생으로 찍혀

블랙 리스트에 올랐다는 사실을 나중에 

학교로 호출되었던 어머니를 통해 들었다.


나는 참 소심하고 겁이 많은 사람이어서

정의를 위해 내 몸 하나 희생할 위인이 되질 못 한다.

그 사건 때문에 전혀 깜이 되지도 못 하면서

블랙 리스트에 오른 것은 두고두고 나를 우쭐하게 했다.


(믿거나 말거나 나 이래 봬도 혹독했던 유신시절

블랙 리스트에도 올랐던 사람이라우.)


시간은 택시 미터기처럼 그렇게 속절 없이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