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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희미한 옛 추억의 그림자 6

희미한 옛 추억의 그림자 6


어제 고등학교 3 학년 때 반 친구들을 만나서

그 때 그 사건(?)에 대해 물어 보았으나

아무도 기억하지 못 했다.


절대 절명의 그 순간을 기억하는 건 나 밖에 없었다.

나와 상관 없는 일은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기 쉬운 법이다.


아무도 알아 주지 않고 나 혼자 기억하고 경험했던  

그 절박함의 허무함,


그러나 다시 무소의 뿔처럼 간다.


오늘 저녁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야 하기에

다시 추억이 담긴 삼베포를 힘 주어 짜기로 한다.


전국의 초중고 학생들이 모은 폐품을 팔아 모은 돈으로

정부는 미국에서 F4 팬텀 전투기 다섯 대를 구입했는데

그 때 그 비행기 다섯 대를 미국 본토로부터 인수해서

한국의 영토까지 안전하게 가져온 편대장이 

강씨 성을 가진 공군 중령이었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편대장의 성이 강씨임을 기억하는 이유는

내가 팬텀기와 인연이 있을 뻔 했기 때문이다.


신문 기사에 난 편대장의 성은 강씨였고

또 흥미로운 사실은 영화배우 신성일의 친 형이라는 사실이었다.

친 형제의 성이 다르다?

신성일이 배우인 까닭으로 예명으로 강성일 때신 신성일을 사용한 까닭으로'

두 사람의 성이 달랐던 것이다.


그 다섯 대의 전투기가 학생들의 방위성금으로 구입되었던 까닭에

정부에서는 전국의 고등학생 다섯 명을 선발해서

서울 하늘을 그 학생들을 태우고 시범 비행을 하는 행사를 기획했다.

열심히 폐품 모아서 학교에 갖다 바치다 보면

혹 전투기에 탑승을 할 수 있는 로또 당첨의 기회를 잡을 수도 있음을

은연 중에 밝히려던 것이었을까?

아니면 말 그대로 학생들에 대한 순수한 보은의 차원이었을까?


그런데 그 전투기에 탑승할 수 있는 

다섯 명의 로또 당첨자를 선발하기 위해

공군은 전국의 고등학생 중 일단 두 배의 인원인 10 명을 선발했는데

그 열 명의 고등학생 명단 중에 

당당하게 내 이름이 올라 있었다.


그건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폐품 수집에 봉숭아 학당의 맹구처럼 달려들었던 것도 이니고

겨우 시늉만 내었을 뿐인데

예나 지금이나 

로또나 보물찾기완 전혀 연이 닿지 않는

내가 선발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기이했다.


그런데 그 의문은 옆 반 어느 선생님의 말씀으로 풀렸다.

전국 10 명의 후보 중 

우리 학교에 한 명을 추천하라는 공문이 내려왔는데

고 3 담임회의에서 그 후보자를 결정했다고 한다.

금정철이라는 친구가 강력한 후보자로 부각되었는데

정철이는 이미 공군사관학교 1 차 시험에 당당히 합격한 상태였다.


정철이는 공부도 잘 하고 얼굴도 미남인데다가

착하고 심성 고운 훈남으로

나와는 중학교 때부터 친구였다.


정철이가 우리 학교 대표로

후보지에 이름을 올리는 것에 대해서 

누구도 딴지를 걸 사람이 없었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런데 정철이를 밀어내고

나를 그 자리에 꽂은 것은

다름 아닌 우리 담임이었던 것이

옆 반 선생님의 증언을 통해 드러나게 되었다.


보지 않아도 뻔했다.


장비처럼 핏대를 올리며 자기 반 학생을 추천하려는 일종의 탐욕으로

온순하고 교양 충만한'다른 선생님들을 제압햇던 것으로

나는 판단한다.

그 현장에 있지는 않았지만 거의 뗑깡의 수준이 아니었을까?


뭐 이권이 달려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다른 선생님들은 뭐가 뭐 무서워서 피한다고

그냥 우리 담임선생의 핏대에 압도 당해서

나를 학교 대표로 보내는 조약에 마지못해 승인을 했을 것이다.


뭐 내가 댓글로 공작을 해서 여론을 조작한 것도 아니고

뇌물을 학교에 갖다 바친 것도 아니었으니

내게 굴러온 호박을 호기롭게 

차 버릴 정도로 의협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우리 담임 선생이 나를 적극적으로 추천한 이유로

정의감이 투철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라는 게

내게 전언한 선생님의 증언이었다.


나는 어찌어찌하여 정의로운 인간이 되었는데

내가 원한 것도 아니었고

내가 진실로 그런 사람도 아니었다.

역사의 흐름에 떠 밀려 마지 못해 

나는 정의로운 인간이 되어야 할 운명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양심 고백을 할 정도로

정의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솔직하지도 않음에도

도도한 역사의 흐름에 몸을 맡겨야 했다.


(여기서 나는 서둘러 글을 마쳐야 하니

빨리 짐을 싸라는 압력이 마구 들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나는 공군 항공 의료원에서

전국의 각지에서 모인 학생들과 신체검사를 받고

전투기 탑승 요령등을 교육 받았으나

정작 전투기에 탑승해서 하늘을 나는 기회를 잡지 못 했다.

이런 결과를 미리 알았더라면

나는 호기롭게 그런 기회를 정철이에게 양보했을 것이나

예로부터 미래는 늘 불투명 했다.

불투명 한 미래 때문에 

어떤 이는 진실되게, 어떤 이는 비겁한 방식으로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나는 어떤 부류의 사람일까?


나는 정철이가 공군 사관학교에 가서 

전투기 조종사가 된 줄로만 알고 있었으나

몇 해 전 한국에 와서 확인해 본 결과 의사가 되어 있었다.

어차피 내가 그 비행기를 탈 수 없는 운명이라면

호기롭게 그 기회를 정철이에게 양보했더라면

얼마나 모냥 나는 일이었을까?


미래를 알지 못 하기에

눈 앞의 이익에만 급급했음을 고백한다.


나는 폐품 수집 사건(?)으로

담임 선생을 제압하고

명실상부한 우리 반의 짱이라는 생각을 하며 지냈다.

나는 완벽한 승자라는 자만에 빠져 살았다.


그런데 학교 대표를 선발하는 과정에서 보여 준

담임 선생의 태도에서

나에 대한 삐뚜름한 시선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유치한 영웅심에서 비롯된 나의 모든 허물을

정의로움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보신 마을을 읽을 수 있었다.


눈이 삐었다.


나는 그렇게 모욕을 준 학생을

이런 식으로 대우하는 담임 선생에게

완전히 KO 패 했음을 40 년도 더 된 이 시점에서 

겸손되이 인정한다.


나를 모욕 준 사람을 

나는 어떤 방식으로든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에로부터 부모님 앞에서 자신을 부르는 말로  

불초 소생이라는 표현이 있다.


자식은 부모님을 뛰어 넘을 수 없는 존재라는 걸 

겸손되이 고백하는 표현이다


나같은 불초가 

부모 앞에서

그리고 선생님 앞에서

또 친구들이나 후배, 자식들 앞에서 

방지고 오만한 마음가짐으로 육십 평생을 살아온 것은 아닌지----


고등 학교 3 학년 담임 선생을 추억하며

나는 얼마나 겸손된 삶을 살고 있는지 

반성하며 이 글을 일단 맺는다.


이쯤해서 담임 선생 끝자락에 님이라는 존칭 하나 살며시 밀어넣어야 겠다.


(집에 돌아 가서 시간이 되면

부록으로 항공 의료원에서 벌어진 해프닝을 한 번 써 보려 하는데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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