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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희미한 옛 추억의 그림자 3

희미한 옛 추억의 그림자 3


내 눈의 스캔과 두뇌에 저장하는 능력은

예비고사를 보는 날 절정에 달했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는 예비고사와 본고사 두 가지 시험을 통해서

대학에 갈 수 있었다.

예비고사는 자기가 지원하는 대학이 있는 곳에 합격을 해야 했는데

3지망 까지 지원할 수 있었다.

나는 아마도 우쭐한 기분에 3 지망까지 모두 서울을 썼던 것 같다.


그러나 사실 나는 속 빈 강정이었다.

다시 설명 하자면 

국어와 영어, 이 두 과목만 확실하게 준비가 되어 있었고

다른 과목은 완전 젬병인 상태였다.

내가 무슨 용가리 통뼈도 아니고

영어와 국어의 배점이 높긴 하지만

그 두 과목을 잘 하는 것만으로는

서울 예비고사에 합격하기는 영 무리였다.


영어와 국어 이외의 과목은 제로 베이스에서 시작해야 했다.


국어와 영어 시험을 다 맞아도

나머지 과목은 사지 선답형이니 25% 확률을 더 해도

서울 지역 예비고사에 합격한다는 것은 그리 녹녹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전술이

나에게 주어진 능력, 바로 스캔 그리고 저장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추리력 빠른 사람은 알아차렸을 것이다.

암기 과목이라고 할 수 있는 국사를 집중적으로 파는 것이었다.

그 집중력은 절실함과 비례해서 발휘된다.


나는 예비고사 시험장에 한 시간 전에 도착해서

국사책을 스캔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국사 시험을 보는데 내 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국사책에 들어 있는 사람들이며 사건의 연도, 사건들이

눈에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 아닌가?


한 시간 만에 띤 국사책 덕에

국사 시험에서는 한 두 문제 빼고

다 맞은 것 같다.


국어 영어, 국사 문제는

시험이 끝나고 답을 맞추어 보니

거의 다 맞은 것으로 기억이 된다.


나머지 과목인 수학, 지리, 지학, 물리, 생물 등은

무슨 답을 썼는지 전혀 기억이 없으니

내가 생각해도 한심할 정도였고

세 지망 모두 서울을 써 넣은 것이 조금 후회가 되었다.


어쨌든 우리 나라 교육의 문제점은

내가 한 시간 동안 공부한 국사 덕에

서울 예비고사에 합격했다는 사실로 뚜렷해진다.

인과관계와 흐름을 아는 것이 역사인데

한 시간 책 보고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있다는게

그 때는 맞았는데 지금은 틀렸다.


이렇게 세 지망 모두 서울을 쓴 덕에

아주 쓴 맛을 본 친구가 있었으니

그 친구 이름이 순복이다.


순복이는 육군 사관학교를 지망했는데

필기시험에서 당당히 1 등으로 함격되었다.

그런데 잘난 척 하느라 나처럼 1지망부터 3지망까지

모두 서울을 지원한 까닭에 결국 육사에 가지 못했다.


육군사관학교는 서울에 있었지만

전국구여서 어느 지역 예비고사에 합격해도

합격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순복이는 서울 예비고사에 떨어진 까닭에 비운의 주인공이 되었다.

순복이 개인으로는 비운일 수도 있었으런지 몰라도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는 하늘이 도운 아주 다행한(?) 일이었다.

몇 년 전 만난 순복이를 보고 그런 나의 확신이 굳어졌다.

시간은 좋은 것이다.

남의 비운을 40 년이 지난 지금은 이리 담담히 말할 수 있으니 말이다.


내 기억으로 예비고사는 300 점 만점으로

체력장 점수가 20 점이고 

국어와 수학, 영어 국사 같은 과목의 배점이 높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중에 보니 서울 예비고사의 커트라인이

192 점인가 그랬는데 나는 232 점인가 받았다.


나를 평소 과대평가햇던

담임선생이 내 예비고사 성적을 보고 

잠깐 놀란 표정을 잠깐 짓기는 했으나

거기에는 위로의 마음이 배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우리반의 에이스였는데 리액션이 참으로 미약했다.

대학 시험은 대학 자체에서 실시하는 본고사 성적에

예비고사의 성적을 합산하는 방식으로 전형을 치루었는데

SKY 에 지원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260 점에서 270 점이 되어야 했으니

이미 장기에서 차나 포는 아니더라고 상 정도 하나는 잃은 상태에서

대학 시험을 보아야 했다.


그제서야 공부는 별로 하지 않고 열심히 망상에 빠져 있는 내가 후회되기 시작했다..

아니면 학교 끝나고 도서실에서 공부하기로 작정은 했지만

도서관 문턱에 이르면 그냥 지남철의 N극이 S극을 밀쳐내듯

도서관과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밀쳐냈다.

가방을 도서관에 무심하게 던져 둔 채

잠깐 몸이나 풀자면서 야구를 하다 보면 

어린 시절 시장기 몰려 오듯 쉽사리 날이 기울곤 했다.

이종환이는 그런 면에서 내게 빚을 졌고

나 또한 그런 면에서 자유롭지 못하니

그냥 퉁치기로 하자..


집에 돌아와서 저녁을 먹으면 피로가 몰려 왔다.

그러면 책을 펴 놓고 5 뷴이 채 되지 않아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눈꺼풀의 무게를 느껴야 했다.


의지 부족


어린시절부터 그렇게 나는 살아가는 방식이

야물지 못하고 불성실했다.

그것은 오로지 내가 잘났다는 헛된 자만감 탓이었는

그것도 내게 주어진 능력 한도에서였다.

그 나머지는 예비고사 시험에서 무슨 답을 썼는지도 모를 정도로

다른 분야에서는 미천하기 짝이 없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젠 스캔 그리고 저장의 능력도 사라지고

다른 분야는 더 말 할 필요도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혹시 나를 만나면 스캔, 그리고 저장의 능력을 시험하지 마시라.

나 슬퍼질 것 같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나니

그렇게 마음이 자유로울 수 없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나보다 못 한 사람이 없고

나는 그 훌륭함을 칭찬한다.

요즈음 우리 친구들을 보면 

점점 더 그 들의 아름다운 면모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학창 시절엔 보지 못 했던.


젊은 사람들을 만나도

나의 우수함보다는 그들의 우수함을 특별함을 즐겨 입에 올린다.


잘한다, 훌륭하다.


이 두 마디면 그들은 즐겨 나의 도우미가 되길 청한다.


꼰대 소리 듣지 않고 살아가는 비법이

내게 든 것, 가진 것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니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어제 부산에서 출발해서 통도사의 홍매화를 보고 경주 가서 토함산에 올랐다가 서울에 올라 왔다.

오늘은 고등학교 친구들의 문화탐방이 있는 날 

설레는 마음 때문에 더 글을 이을 수가 없다.)


통도사의 홍매화가 막 터지기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