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써이'
고등학교 3 학년 때 담임 선생이 내 이름을 부르는 방식이다.
이름 마지막에 들어가는 'ㄴ'자는 생략하고
그 자리에 당당하게 자기 맘대로'이'자를 배치해서
본래 내 이름인 김학선을 왜곡하곤 했다.
그렇게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을 왜곡당한 채
고등학교 3 학년 시절을 보낸
친구들 이름을 기억나는대로 적어보면
나를 위시해서 남궁후이, 진동혀이, 이종화이 등등이다.
남궁훈 같은 친구는
얼굴이며 몸매는 전혀 왜곡되지 않은채
그 미모가 뛰어났음에도
이름은 담임선생 때문에 비틀어진 운명을 맞았던 것이다.
우리는 3학년 내내
이렇게 불편하고 정당하지 않은 대접을 받으며 보내야 했음에도
아무도 거기에 대한 불만을 입 밖으로 내어 놓지 않고
안으로 삭이며 성숙해가고 있었다.
이름을 부르는 방식부터
나는 담임 선생(님이 아니고)이 못마땅했다.
숙명처럼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기에는
나는 너무 까칠했다.
그 날카로움은 구석기 시대를 지나
신석기 시대에 이른 칼처럼 진화를 거듭한 탓에
날이 제법 선 상태였다.
(친구들은 내가 얼마나 쌀쌀맞고 속으로이긴 하지만 싸가지가 없었는지를 요즘 증언하고 있다.)
내가 정해 놓은 좋은 선생님의 기준은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교과목에 대한 실력이 출중하고
그것을 학생들에게 잘 전달하는 능력이 있어야 하며
자애로운 눈길과 손길을
'샘이 깊은 물'처럼 아낌 없이 쏟아내는 그런 존재여야 했다.
그러나 우리 담임선생은 내 기준에 이르기에는
아예 불가능한 지경이었다.
내 기준으로 담임선생 지원 양식을 만든다면
이름이며 주소 주민등록 번호과 가족관계를 적고나면
우리 담임 선생은 너 이상 채울 거리가 없었을 것 같다.
그런데 수학을 담당했던 담임선생의 실력을 판단할 능력이
애초에 내겐 없었다.
수학은 덧셈 뺄셈, 그리고 구구단을 외우는 걸로
이미 내 능력의 한계를 드러낸 과목이었기 때문이다.
내 실력은 수학에 이르지 못한 채
고등학교 내내 산수의 영역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다.
(담임 선생으로서는 다행한 부분이다.)
다만 문과 반의 수학을 담당한 것으로
담임선생의 실력을 삐뜨름하게 볼 뿐이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수학 시간에 문제가 생겼다.
담임 선생이 칠판에 문제를 내고 풀어보라고 하는데
우리 반 친구들 60 여 명 중 아무도 푸는 사람이 없었다.
사실그 문제를 아무도 풀지 못한다면
학생들에게 문제가 있기도 하지만
교과를 담당한 선생도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담임 선생은 한심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차더니
갑자기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닌가?
김학써이!
말하자면 나는 물 속에 빠진 선생과 친구들 모두의 지푸라기였던 셈이다.
그런데 내 이름 하나 제대로 부르지 않는(못하는)
담임 선생에게 '뽄때'를 보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봉숭아 학당의 맹구처럼
"저요 저요"하며 들이대지 않는 성격을 가졌다.
나는 알면서도 기회가 익어가길 기다렸다.
결정적인 순간에 내가 가진 패를 낼 요량이었다.
바로 전 날 우연히 '팬텀'이라는 수학책을 뒤적거리다
먀침 담임선생이 칠판 위에 낸 문제와 똑 같은 수학 문제와 조우하게 되었고
나의 뇌는 그 문제와 답을 그대로 스캔을 해서
안전하게 저장을 끝낸 상태였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지푸라기 제대로 잡았다.-
'팬텀 수학'은 '수학의 정석'보다 높은 수준의 수학 참고서였는데
수학의 정석조차도 제대로 펼쳐보지 않은 내가
팬텀 수학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은
아무래도 영혼의 과장된 사치 내지는 허영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투명한 창으로 나를 들여다 보았을 때
0.01 퍼센트의 여지도 남겨둘 필요도 없이
100% 팩트였을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 당시 나의 뇌는 눈으로 스캔한 것들을
내장 하드에 고스란히 저장하는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순간이 그 능력을 드러낼 절호의 찬스였다.
사실 그 문제의 답을 기억한 것은
여러 줄의 해법을 제시해야 하는 과정 없이
바로 답이 나오는 그런 유형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과정은 애초에 스캔 단계부터 과부하가 걸린다.)
나는 선생의 호출에
담담한 표정과 느린 걸음 걸이로 칠판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문제의 답을 내 걸음걸이처럼
일정한 박자와 강도로 칠판 위에 적었다.
그 순간 담임선생 뿐 아니라
아이들 입에서 탄성이 새어 나왔다.
최근에 친구들에게 이 숨가빴던 순간에 대해 물어보았는데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다.
40 년이 넘는 세월 탓일까?
아니면 내가 우쭐한 기분에 환청을 들은 것일까?
그 이후로 나는 나의 위치를
담임선생의 높이로 스스로 올려 놓았다.
외양으로는 아니어도 나는 담임선생과 맞짱 뜰 수 있는 존재로 여겼다.
내 인생 최고로 자존감이 높았던 시절이었다.
그 이후로 담임선생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나긋나긋 하게 변했다.
(일방적인 나의 생각일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음을 이해하시라.)
김학써이 라고 부를 때
김과 학을 발을할 때는 평성이다가
갑자기 써'에서 액센트를 주었다가 마지막 '이'자를 발음할 때는
다시 평성으로 떨어졌다가 꼬리를 내리는 방식이었는데
그 뒤로는 '학서이'로 경음 "써'가 평음 '서'로 부드러워졌다.
성인 김을 빼고 이름만 부름으로써
내게 친근감을 보이려는 노력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사건 이후로
다시 한 번 담임선생에게 뽄때를 보일 기회는 전혀 찾아오질 않았다.
우연도 반복되어야 실력이지
한 번에 그치면 요행이고 우연일 따름이다.
일회성 사건이고 우연이긴 했지만
스스로 올려 놓는 내 위치에서 자진해서
아래로 내려올 갸륵한 마음가짐이 내겐 없었다.
그런 소강상태가 얼마간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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