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의 이야기

운수 좋은 날

어제는 Valentine's Day이자 Ash Wednesday


상극이라면 상극이라 할 수 도 있는 

두 다른 성격의 기념일이 한 날에 몰려 있는 셈이다.


우리 식구들 페이스 북엔

아침부터 Happy Valentine's Day!의 내용을 담은

인사말이 오갔다.

(미국에선 Valentine's day는 연인 뿐 아니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 사이의 기념일이다.)


아내는 점심 도시락과 함께

사랑의 편지와 초콜렛을 가방에 담아 주었다.


예전엔 아주 자주 길거리에서

이마에 재를 받은 사람들을 찾아 볼 수 있었다.

어제는 어쩐 일이지 한 사람도

이마에 재를 받은 사람을 볼 수 없었다.


빨간 장미와, 달콤한 초콜렛과, 화려한 풍선이 

거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우울하고 허망한 

재의 흔적은 만날 수 없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가는 줄 알았다.

적어도 날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한 청년이 검정색 진 한 벌을 들고 

어둠과 함께 세탁소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는---


그 청년은 머리에 얹힌 모자부터

발에 신은 운동화까지

범상하지 않은 힘합 스타일의 차림새를 하고 있엇다.


그 청년은 카운터에 검정 진을 내려 놓으며

뻥(?)을 치는 것이 아닌가?


"이 진 하나가 천 오백 달러나 하는 거야."


내가 이 지상에서 싫어하는 부류의 사람 중 하나가

뻥이 심한 사람이다.


나는 진을 돌려 주며

다른 데 가서 알아보라고 했다.


세탁을 위해서가 아니라 

공연히 허세를 부리기 위해 세탁소를 찾은 것 같은

불쾌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게다가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그 큰 돈을 배상해야 하는 책임감도 그 옷을 거부하는 데 한 몫을 했다.


받는 돈에비해

부담감이 엄청나게 큰 까닭으로

내가 오만한 자세로 세탁 거부 의사를 밝혔다.

그러자 그 청년의 태도가 급속하게 

공손 모드로 전환되었다.


그 태도에 불끈했던 감정이 나긋나긋해진 나는

굳이 굴러 들어온 손님을 돌려보낼 일도 아니고 해서

그 진을 세탁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세탁을 담당한 직원에게

천 오백 달러나 하는 진이니

조심해서 다루라고 농담조로 일렀다.

내가 보기에 비싸 봐야 백 달러를 넘지 않을 거 같았다.


잠시 후에 직원이 내게 와서

그 진이 정말 '천 오백 달러' 짜리라는 걸 알려 주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그 브랜드의 그런 종류의 진이

천 오백 달러 정도 간다는 걸  확인한 나는

망연자실했다.


요즘은 하루에 열 두 시간 씩

일주일에 6일 꼬박 세탁소에 나와 있어도

그런 진 한 벌 살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내가 이러려고 세탁소를 하나' 하는 

잿빛 자괴감이 어둠과 함께 내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물론 여우의 '신 포도' 처럼 나는 그런 진은 누가 거저 주어도 입지 않는다.)


어쨌거나

아내가 손으로 쓴 '사랑의 편지'와 쵸콜렛의 달콤한 맛,

그리고 청년 손님이 들고 온 검은 진이 내게 선사한 씁쓸하고 신 맛,

이 두가지 인생의 맛을 골고루 보았으니

어제 Valentine's Day와 Ash Wednesday를 

나처럼 의미 있게 잘 보낸 이도 드물 것이다.


참으로 운수 좋은 날이 아니었던가 싶다.



아내의 손편지



문제의 검은 색 힙합 스타일의 진

가격이 무려 천 오백 달러.

한국 왕복 비행기 표 보다 비싸다.


http://blog.daum.net/hakseonkim1561/1898












.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희미한 옛 추억의 그림자 1  (0) 2018.02.22
밤으로의 긴 여로 (Long Day's Journey into Night)  (0) 2018.02.20
아침 하늘빛 때문에-----  (0) 2018.02.09
Williamsburg 사진산책  (0) 2018.02.05
꼬뱅이가 시리다.  (0) 2018.0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