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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부끄러운 이야기 하나 - 눈 뜬 장님

부끄러운 이야기 하나 - 눈 뜬 장님


8월이다.

아무래도 7.8월이 휴가철이다 보니

세탁소 손님들 중 많은 사람들이 휴가를 떠난 관계로

파리가 날릴 정도는 아니어도

많이 한가하다.


몇 년 사이 한층 빠듯해진 세탁소 살림에

휴가철의 한가함은

곧 소득의 빠듯함으로 연결된다.


세탁소 안의 열기는

내 머릿속의 짜증스런 열기와 함께

지구 온난화의 한 요인이 되기도 한다.


낯익은 손님이 세탁소 안으로 들어온 것은

오후 세 세 쯤이었다.

"앞이 보일까?" 하는 걱정이 될 정도로 짙은 렌즈의 

안경을 쓴 채 조심스런 걸음걸이로

세탁소 안으로 발을 디민 건

T씨였다.


최근에 눈 수술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는 우리 세탁소가 문을 열 때부터 손님이었는데

멀리 이사를 간 후로

소식이 없다가

최근 2-3년 전부터 다시 

집에서 멀다면 먼 거리의 우리 세탁소를 찾는

80이 다 되 가는 홀아비다.


T씨는 전형적인 홀아비다.

찌든 냄새가 그가 입었던 옷에서도 배어나는----

그러니 그의 체취가 묻어 있는

옷이 담긴 플라스틱 백을 여는 순간이

내게는 늘 유쾌하지 못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런데 며칠 전에는

그가 들고 온 백을 여는 순간

하마트면 과묵한 내 입에서 비명이 터질 뻔 했다.


세 벌의 옷에서

제일 먼저 내 눈에 들어 온 것은

'Bed Bug'이라 부르는 빈대였는데

그것도 한 두 마리도 아닌 십여 마리가 꼬물대고 있었다.


나는 짜증부터 내었다.

(이럴 때 내 표정을 보고 싶다.)

T 씨에게 옷을 밖으로 가지고 나가

털어 오라고 했다.


미안하고 당황한 T씨는 

잘 보이지 않는 눈 때문에

엉금엉금 걸어서 밖으로 나가

내가 시키는대로 옷을 털어 나에게 다시 들고 왔다.


물론 그의 옷에 있던 빈대가 다 털려진 것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나는 마치 숙제를 제대로 하지 않은

아이에게 벌을 주듯 그 일을 시킨 것이었다.


"좀 똑바로 보라고."


T씨가 가게를 떠나고

나는 그의 옷들이 충분히 담기는 크기의

플라스틱 통 안에 넣고

물과 비누를 섞어서 옷들이 잠기게 했다.

그러면 그 옷에 있는 빈대는 전부 익사할 것이라는 계산에서였다.


다음 날 T씨의 옷은 

다시 잘 세탁을 해서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었다.


T씨의 옷들은 윤기가 날 정도로 말끔해졌는데

반대로 내 마음은 T씨의 세탁전 냄새나고 구겨진 옷처럼

께름직했다..


내가 T씨를 대한 태도가 마음에 걸린 것이다.


앞이 보이질 않아 걷기도 불편한 사람이

먼 길을 찾아 왔는데

나는 그가 빈대라도 되는 것처럼 

마구 대했다는 자책감이 나를 떠나지 않았다.


그가 경험했을 수치감과 모멸감은

내 진한 짜증에 묻혀 있었던 것이다.


그는 눈이 어두워 집 안에 빈대가 들끓는 걸 보지 못했을 것이다.

자기 살을 물어 뜯는 빈대의 공격에

모기에 물린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그의 외로움과 모멸감을 보지 못했다.

그의 부끄러움은 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주변의 빈대를 보지 못하는 육신의 눈

이웃의 아픔과 부끄러움을 보지 못하는 마음의 눈.


그 두 눈의 시력이 좋지 않다면

어느 편이 더 불편할까?


T씨는 눈을 뜨고도 빈대를 보지 못한다.

나는 눈을 뜨고도 이웃 마음을 보지 못한다.


마음의 시력이 약하면

생활 가운데서 불편함을 깨달을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웃의 마음을 다치게 하고

수치와 모멸감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눈을 뜨고도 마음을 보지 못하는

나야말로 눈 뜬 장님이 아닐까?


T씨가 옷을 찾으러 오면

그의 손이라도 잡고

잘 보이지 않는 그의 눈에 대해서,

혼자 사는 외로움에 대해서, 

물어보고

조용히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 있도록

마음의 귀를 여는 연습이라도 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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