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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비의 나그네 (20 여년 전의 글)

---- 비 오는 날엔, 사랑하는 사람들은 더욱더 사랑을 하게 되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도 사랑을 하게 된다-----


1
고등학교 삼 학년 때 읽었던 고은 시인의 글이 나를 빗속으로 내 몰았습니다.

비가 오면 비의 나그네가 되었습니다.
사랑하고 싶었고 또 그만큼 사랑 받고 싶었던 젊음이
빗속을 떠 돌았습니다.
비를 맞으며 사랑에 흠씬 젖고 싶었습니다.
어느날, 빗속에서 깨우침을 얻게 되었습니다.
비 오는 날 왜 사랑하게 되는 지를------
깨달음을 얻은 스님이 게송을 짓듯이,
고은 시인이 던진 그 화두에 답하는 시를 쓰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삼십여 년------
기억 속에 묻혀 있던 그 화두를 꺼내 시를 쓰려 해 보았지만,
시는 되어지지 않고,
시작 노트의 언저리에서만 맴도는 잡문 밖엔 남은 것이 없네요.
그렇지만 사랑은 구도의 길 같은 것,
사랑이란 화두를 껴 앉고 평생 풀고
또 이루어 가야 겠지요.

2
젊은 시절, 비가 내리면, 비를 맞으며 무작정 걷곤 했습니다.
교외선을 타거나 경춘선에 몸을 싣기도 했지요. 
아무 역이나 물이 흐르는 곳에서 내렸습니다.
‘일영’, ‘송추’, ‘장호원’ 같은 역 이름이 떠 오르고,
‘강촌’ 같은 곳에서 비를 맞은 적도 있었습니다.
강물 옆에서 하염없이 비를 맞으며,
흐르는 강물을 바라 보았습니다.
갈대 숲이라도 있는 곳이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습니다.
빗속에서 “사랑한다’, ‘사랑한다’ 속삭이기도 하고,
세차게 비바람이 휘 몰아 칠 때면,
득음을 하기 위해 폭포 옆에서 소리 연습을 하는 소릿꾼처럼
목청에 피가 맺히도록 ‘사랑한다’고 외쳐대기도 했습니다.
사랑의 대상은 ‘어떤 누구’여도 좋았고, ‘
아무 누구’여도 상관 없었습니다.
그저 사랑하고 싶었고,
또 그만큼 외로왔으니까요

내 사랑의 언어는 비에 녹아서 냇물로 흐르고,
또 강물이 되어 흐르다가 바다에 이르르겠지요.
그리고 하늘에 올라 구름이 되었다가,
오늘처럼 다시 비가 되어 내리는 지도 모를 일입니다..
먼 옛날, 어느 누군가가 나처럼,
비가 내리면,
빗속에서 그 누군가에게 사랑한다고 외쳤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의 비를 맞고 자란 나는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어도,
저절로 사랑하게 되었으니까요.
먼 훗날, 그 누군가도 비를 맞으면,
내가 그랬듯이,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때가 되면 절로 사랑을 하게 되겠지요.

3

오늘 오후엔 Hudson 강가,
Piermont의 갈대 숲에 나가 보렵니다.
강 쪽을 향해 그리움 만큼의 목을 빼어든 갈대들은
어느새 내 키의 두 세 배는 자라 있겠지요.
그 갈 숲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갈대 잎에 떨어지는 빗소리에서
내 젊은 날의 사랑의 언어들과 만날 수 있을 것 같으니까요.
빗방울에 서걱이는 갈대들이 들려주는 그 숱한 사랑의 언어들을-------
비에 젖어서,
그래서 다시 온몸과 영혼까지 푹 젖는 그런 사랑을 다시 시작하고 싶습니다.

P.S 오늘 이 곳에는 비가 내립니다.
이런 날은 드보르작의 첼로 협주곡이 제격입니다.
커피 한 잔의 향기와 함깨 빗소리가 깔린 첼로의 선율이
어우러지면------
아, 이 지상에서 맛보는 몇 안되는 열락입니다.

(이십 여년 전 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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