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의 이야기

떳떳하게, 뻔뻔하게

고등학교 친구들이 독서 토론회를 만들었다.


나는 노안이 온 뒤로는 거의 책을 읽지 않는다.

그래서 지식의 흐름을 알지 못 하는 무식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공표를 하고 다닌다.


책을 가까이 하지는 않으면서도

독서에 대한 무한한 애정만은 갖고 있다.


한 때 나는 책에 대한 무한한 집착을 가졌던 때가 있다.


밥을 굶어가면서 헌 책방 순례를 했다.

이미 절판이 된 양주동 선생의 '고가연구'라는

희귀본을 손에 넣은 적도 있다.

시인들의 시집이며 수필집 등----

이제 세상에 내어 놓으면 아는 사람들은

침을 꿀꺽 삼킬 만한 책들이 꽤 있어서

대학 시절 내 방 벽 면 중 둘은 책으로 채워졌었다.


그런데 내가 미국에 이민 온 후에

그 책은 우리집의 골칫덩이가 되었고

부모님이 이사를 하시면서

골칫덩이는 고물상의 환희가 되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애통할 여유도 없는 

벌꿀보다 바쁜 이민의 삶을 살고 있었다.


책을 읽는 것이 어쩌면 나같은 이민자자들에겐

사치일 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책에서 멀어진 삶이긴 해도

책은 첫사랑처럼 내 머리와 가슴에서 지워진 적이 없다.


마침 지난 2 월 한국에 갔을 때

고교 동기들이 독서 모임을 한다기에

나도 시간을 내어 참여하기로 했다.

마침 2월의 책은 김훈의 '칼의 노래'였다.


온라인으로 주문한 책을 받지 못 하고

한국으로 출발을 했다.


친구 장섭이에게 부탁했더니

책을 들고 호텔로 찾아 와서 저녁까지 사 주었다.

나는 아린 눈을 비벼가며 독서 모임을 하는 시간까지

밀린 숙제 하듯 책을 읽었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로 시작하는 

김훈의 '칼의 노래' 첫 문장에 빠져서

헤어 나지 못하고 얼마를 멍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시차의 노예가 되어 멍멍한 상태로

겨우 숙제를 끝낼 수 있었다.

무얼 읽었는지도 모른 채로.


독서 모임을 위해 책과 씨름하며

한국 방문 하루를 꼬박 보낸 셈이었다.

선릉 역 근처에 있는 '최인혜 책방'에서  친구들과 만나

책에 대해서 각자 읽은 소감을 나누었다.


그리고 공식 모임을 마치고

책방 근처 뒷골목에 있는 막걸리 집에서 

모임을 이어 갔다.

다음 달에 있을 '구글의 미래'라는 책의 맛보기를 하는 셈이었는데

내 머리로는 도대체가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이 오갔다.


못 마시는 술이어도

막걸리가 입에 착착 붙는다는 표현이 이해되는.

그런 밤이 익어갔다.


나는 책이 좋아서 모임에 갔을까?

아니면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서

그 곳에 갔던가.


각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같은 전철을 탄 우리 셋을 

건너 편에 앉았던 친구가 

카메라에 담았다.


그 자리는 마침 경로석이었다.

내가 찝찝해 하니

장섭이가 우리가 앉아도 되는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어차피 늦은 시간이니 그 시간에 다니는 노인들은 (거의) 없으며

일반석에 앉으면 젊은이들이 크게 반기지 않는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런데 우리 셋 다 머리가 허옇다.

고등학교 졸업한 지 40 년이 훌쩍 지나가고 나니

머리색이 바뀌었다.


머리가 허여니 머리 색으로만 보면

경로석에 앉을 이유가 충분하긴 하다.

그러니 떳떳하게 앉았다.


그런데 나이로 보나

혈색으로 보나 셋이 다 아직은 얼굴에 소년 티(?)가 남아있다.

(막걸까지 마셨으니 오죽하랴)

그러니 뻔뻔하게 그 자리를 차지해야 했다.


이름하여 '흰머리 소년'


우리 앞에 열린 세월에도

경로석에 떳떳하고, 뻔뻔하게 앉아서

언제까지 유쾌한 수다를 이어갈 수 있는

그런 친구들과 함께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아주 뻔뻔하기 짝이 없는 바람을 적어 본다.




사진 왼 쪽은 국립 중앙 도서관장을 지낸 친구

가운데는 에비역 육군 장성

오른 쪽은 나.

그러고 보니 전부 육군 장교 출신이다.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족 사진 - 20년 , 그 세월  (0) 2017.05.17
미남 경호원  (0) 2017.05.16
내리사랑  (0) 2017.05.08
일요일 일기 - 꽃 지다 꽃 피다  (0) 2017.05.08
Pondside Park 한 바퀴  (0) 2017.0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