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일요일,
주말 이틀 동안 날씨가 환상이었다.
봄날은 이래야 한다고 시범이라도 보이듯이
더하고 뺄 것도 없이 한 마디로 완벽하게 아름다왔다..
따사로운 햇살이며 푸른 하늘,
그리고 막 푸릇푸릇 돋아나는 풀들과 꽃들에 취해서
몽롱하게 하루를 보냈다.
그런데 요즘 내 기억상실 증세가 심상치 않다.
요즘 바로 전에 일어난 일들을
자주 잊곤 하는데
어제도 그랬다.
축구를 마치고 돌아왔는데
아내가 물었다.
"오늘은 몇 골이나 넣었어?"
지난 겨울 동안 날씨 관계로 한 두어 달 쉬고
다시 축구를 하려 하니
영 몸이 말을 듣지 않는데다가
우리 축구 팀에서 나이가 제일 많으니
골은 커녕 시간 채우고 오기 바쁜 게 현실이다.
가끔 소 뒷걸음 치다 쥐 잡는 것처럼
골을 넣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그게 어디 자주 있는 일이어야 말이지.
골은 못 넣었지만
측면을 돌파해서 우리 편 선수에게 패스를 한 것을
그 선수가 논 스톱으로 차 넣어
공격 포인트를 기록한 것이 생각이 나서
으시대며 그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나중에 점심을 먹고 가만 생각해 보니
내가 첫 골을 넣은 것이 기억이 났다.
완 쪽 측면에서 자로 잰 듯한 패스를
발만 갖다 대긴 했지만
분명 내가 한 골을 넣은 것이었다.
이리 자랑스런 일을 까맣게 잊다니
정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아닌게 아니라 요즈음 자꾸만 기억상실 증세가
빈번하게 일어난다.
이런 식이다.
가게에 냉장고가 있고
그 위에 전자 레인지가 있는데
어느날 전자 레인지에 음식을 데운 후
먹으려고 아무리 찾아도
감쪽 같이 음식이 사라진 경우가 있었다.
분명 무엇에 홀린 게 분명하다고
속으로 생각을 하고 있는데
냉장고 문을 연 채로
냉장고 속을 샅샅히 뒤지고 있던 나를 발견하고는
먕연자실한 경우가 있었다.
이 비슷한 경험을 점점 더 자주하게 되는데
스스로 걱정스럽기 그지 없다.
사실 내 기억이 소멸되면 나야 편하다.
주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이 문제다.
어제도 축구를 하고 와서는
내가 골을 넣은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얼마나 걱정이 되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또 한 사건이 터졌다.
날이 좋으니
카메라를 들고 나와
집 앞 뜰에 핀 풀과 꽃들을 찍으며 봄을 맛보는 기쁨을 누렸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해가 쥐여뉘엿 넘어갈 때
다시 카메라를 들고 나가
아침에 찍었던 대상들을 다시 한 번 찍었다.
해가 지기 직전 역광으로
대상물을 찍으면 색이 풍부하게 나온다는 걸
경험으로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침에 없던 꽃이 눈에 띄었다.
보라색 꽃인데 낯이 설었다.
제비꽃보다 훨씬 큰데 이름을 모르는 꽃이었다.
아침엔 보질 못했는데
오후에 갑자기 핀 걸까?
아니면 아침에 피었던 꽃을 보고도
기억을 하지 못하는 걸까?
더럭 겁이 나기 시작했다.
아침에 축구를 하며 골을 넣은 기억을
까맣게 잊은 사건도 있다보니
오후에 뜰에 나가
오전에 보지 못한 꽃을 발견한 사건은
더 깊은 근심의 늪으로 나를 밀어넣었다.
소위 멘붕이 온 것이었다.
'이럴 때일 수록 침착해야지' 하며 안정을 찾으려고 애썼다.
우리 식구들 이름을 하나하나
기억해 냈다.
그리고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으로 시작되는
애국가도 불러보았다.
한국어 뿐 아니라 영어로
'Lord's Prayer'도 외워 보았다.
모든 게 완벽했다.
내 기억은 완벽했다.
자가진단을 통해
내 기억력 전선에
'이상 없음'이라는 결론을 잠정적으로 내렸다.
그럼 무엇이었을까,
나를 그토록 걱정으로 몰아넣었던
어제의 그 사건들은.
아, 그래 봄이라 그럴꺼야,
따스한 햇살과 봄바람 때문에
내가 잠시 아지랑이처럼 몽롱해졌던 거야.
오늘 다시 쌀쌀해지니
어제 일들이 또렷이 기억나는 걸 보니
그래 모든 게 다 너무 좋았던 봄 날씨 때문이었을 거야.
아 다행이다.
잎이 다 말라버린 제라늄.
빨간 꽃송이 하나가
저녁 해살에 붉게 타고 있다.
냉이꽃
잔디밭에 잡초처럼 퍼진다.
이게 내이꽃인지 확실하지 않다.
아내가 냉이꽃이라고 해서 그런 줄 안다.
설령 냉이꽃이아니더라도
내겐 냉이꽃이다.
아침엔 보질 못했는데
저녁때 갑자기 나타난 이 꽃 때문에
마음을 많이 졸였다.
바로 이 보라빛 꽃 때문에
내가 기억상실이 아닌가 의심했다.
역광을 받은 풀과 꽃
내 정신이 몽롱해졌다.
이 모든게 봄이라는 계절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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