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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내 눈으로 본 이탈리아

내 눈으로 본 이탈리아 - 피렌체 가는 길

 

내 눈으로 본 이탈리아 - 피렌체 가는 길

 

 

 

기차 출입문의 창을 통해 보이는 해바라기 밭.

 

 

 

로마에서 피렌체로 가는 기차에서 찍은 바깥 풍경.

해바라기 밭이 참 많이 눈에 들어왔다.

 

 

 

좌석 머리 윗쪽의 compartment엔 거울이 붙어 있어서

지루해질 때면 다른 사람들을 흘긋 흘긋 보았다.

 

피렌체로 향하는 기차는

기관차가 유선형으로 아주 날렵하게 생겼다.

게다가 붉은 페인트를 칠했는데

번쩍번쩍 광이 났다.

기차의 내부도 아주 깨끗하고 냉방도 잘 되어서 쾌적했다.

그 전 날 밤 나폴리에서 로마로 올 때 탔던 기차와는 아주 딴 판이었다.

영어 표현으로 치면 'Money talks'(돈이면 다 된다.)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았다.

 

나폴리와 로마 사이의 경치와

로마와 피렌체 사이의 경치엔

채워질 수 없는 간극이 있었다.

천당과 지옥의 차이라고 하면

좀 과장이 섞였을지라도

그 차이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들판이 보였고

그 들판 곳곳엔

해바라기 밭이 있어서

비가 올 듯 우중충한 날씨에도 환하게 빛이 났다.

 

사실 나폴리라는 도시는

을씨년스럽고 슬픈 불루 색깔을 연상하게 한다.

이탈리아가 로마나 피렌체 같은

북부를 중심으로 통일 되면서

나폴리 같이 남쪽 도시는

자연히 모든 혜택으로 부터 소외되었다.

당연히 경제적으로도 고단한 삶을 이어가야 하는 것이

나폴리와 거기 깃들어 사는 사람들의 운명인 것이다.

먹고 살기 힘들어

배타고 이민을 떠나는 나폴리 사람들의

애환과 슬픔을 노래한 것이

바로 '먼 싼타 루치아'이다.

다시 돌아올 기약 없이 머나먼 이국을 향해

나폴리 항을 떠나는

사람들의 창자가 끊어질 듯 아픈 노래. 

 

그 아픈 노래를 머릿속으로 떠 올리며,

그리고 그 가락을 지우며

우리는 로마 북쪽에 있는 피렌체로 향하고 있었다.

열차 안에 있는 모니터에서는

달리는 기차의 속도를 알려 주었다.

평균 시속 240 Km .

기차는 속도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아주 편안했다.

대충 두어 시간이 걸리는 걸로 보아

로마에서 피렌체까지의 거리는 500 Km 남짓하지 않을까

추측을 했는데 맞는 지 모르겠다.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지루해질 때 쯤

나는 열차 사이에 있는 공간으로 나갔다.

바깥의 풍경이라도 좀 찍어보려는 마음 속 계산 때문이었다.

그런데 흐린 날 240Km로 달리는

기차에서 풍경을 찍는다는 건 좀 무리였다.

검표원이 지나 가길래

내 좌석 번호를 알려 주었다.

 

별 의미 없이 몇 번의 셔터를 눌렀을 때

동서가 한 이탈리아 남자를 대동하고 나타났다.

그 남자는 키가 훤칠하고

머리가 조금 벗어졌는데 안경을 끼고

옷을 입은 모습이 제법 멋이 풍겼다.

 

그는 막시밀리아노라는 이름을 가진

피렌체 대학의 교수인데

몇 해전 동서가 부학장 시절에

교환교수로 Baruch College에 1년간 와 있은 적이 있다고 했다.

로마에서 콘퍼런스가 있어서 갔다가

피렌체의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만나게 된 동기가 흥미로왔다.

단도직입적으로 화장실이

두 사람을 만나게 된 매개체 역할을 한 것이다.

이야기인 즉, 우리가 탔던 열차의 화장실도 고장이 났고

두어 칸 뒤에 있던, 마시밀리아노(앞으로는 맥스로 줄여서 부름)가 탔던

열차의 화장실도 제대로 일을 치를 수 없는 상태였다.

동서는 한 칸을 뒤로,

맥스는 한 칸을 앞으로 이동을 해서

문제의 화장실에 당도를 했고

우연히 그 시간이 일치한 관계로

두 사람은 운명적인 만남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그 운명적인 만남은

우리의 일정과 관게가 있음으로 해서

더욱 빛을 발하게 되었다.

 

동서는  Baruch College의 Business School(경영 대학)학장이고

벌써 그 학기가 끝나긴 했지만

맥스는 우리의 이탈리아 여행이 끝나기 전에

Baruch College에서 한 학기 강의를 시작할 예정이었다.

맥스로서는 군대로 치면 차상급 지휘관을

자신의 나와바리(지역, 영토라는 의미를 고상하게 표현할 때 쓰는 단어?)에서

만나게 된 것이었다.

 

맥스는 그 날 오후 피렌체를 안내해주겠다고 했다.

그것이 댓가성이 있었는지

아니면 순수한 마음으로 한 것이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나야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되는

그런 입장이었기에 더 이상 개입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해서 박사 학위를 가진

피렌체 토박이의 영양가 높은 안내를 받아

우아한 피렌체 관광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니

그것이 다, - 맥스의 표현을 빌자면 -

' 이탈리아 식' 덕분이었다.

 

어디 고장이 나도

빨리 고칠 생각은 하지 않고

세월아 네월아 하고

숨 가쁘게 서두르는 법이 없는 것이

바로 이탈리아 식이다.

 

내가 경험한 이탈리아 식은

비행기 예약부터 식당에서 음식 주문 하는 일에 걸쳐

똑 부러지고 절도 있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멀어도 한참 멀었다.

그러면서도 이탈리아가

세계 부자 나라 중 하나인 것은

순전히 조상 탓인 것 같다.

소중한 문화 유산을 남긴 덕에

후손들은 그걸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에게

대충대충 성의 없이 대하면서도

그들의 돈을 자신의

주머니로 고스란히 옮겨 담을 수 있으니 말이다.

이탈리아가 잘 된다면

그건 순전히 조상탓이다.

 

인간적인 지극히 인간적인 이탈리아 식 때문에

맥스를 만났고 그로 인해

피렌체를 여행하는데 큰 도움을 받았으니

'이탈리아 식' 때문에 불편함을 자주 경험하긴 했으나

'이탈리아 식'이 꼭 저주하고 욕만 해댈 대상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동전의 양면성은 삶의 구석구석에

자리하고 있으며

그것을 다시금 체험하고 깨닫는 것은

여행이 주는 또 다른 묘미요, 즐거움인 것이다.

 

어쨌거나 우리는 든든한 안내자를 만나서

아무런 걱정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피렌체에 입성할 수 있었다.

 

피렌체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한 여름의 시원한 소나기가 아닌

후덥지근한 습기를 몰고오는

끈적끈적한 여름비가 내리고 있었다.

피렌체에서 머무는 시간도

더위를 피해갈 수는 없을 것 같은 예감으로

기차에서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