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들
지난 토요일
큰 딸 소영이와 손녀 Sadie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병원에서 나와 우리 집에서 한 열흘 머물고는
무엇이 그리 급한지
서둘러 떠났다.
산후조리를 위해
딸과 손녀가 한 달가량
우리 집에서 머물 예정이었는데
계획을 앞당겨 자기 집으로 돌아간 것이다.
딸 소영이는 엄마의
지나친 관심과 사랑(?)이
조금은 부담이 되었나 보다.
더군다나 자연 분만이 아니고
수술을 통해서 아이를 낳은 탓인지
그다지 산후조리가 필요한 것 같지도 않았다.
꿰맨 부위만 아물면
그대로 정상 생활을 해도 괜찮은 것처럼 보였다.
사실 소영이는 대학을 가면서부터
우리와 함께 산 기억이 별로 없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수입이 넉넉하지 않은데도
독립해서 살다가 결혼을 했다.
그러니 시집살이나 친정살이를 한 적이 없다.
그래서 그런지
아이를 낳고 뜻하지 않게
우리와 함께 지내는 것이
여간 불편하고 답답하지 않았나 보다.
"미역국이 몸에 좋으니 먹어라."
"미역국 싫어."
"닭백숙했으니 먹어."
"안 먹어"
아내는 나름 무척이나 신경을 써서 하는데
딸아이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음식을 거부하니
아내는 아내대로 서운했나 보다.
나야 아내가 베푸는 모든 은혜를
감사히 받아야 할 의무만 있는데
부모로부터 독립한 딸아이는
그걸 거부할 권리도 있나 보다.
마치 군대에서 밥이 설어도,
국이 짜도 거나
음식 맛이 전혀 없어도
"초전박살 감사히 먹겠습니다."
하고 먹는 것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아내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잃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만
알고 있던 나에게
딸아이의
엄마에 대한 항거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결국 아내와 딸은 타협을 했다.
딸이 좋아하는 음식을 하기로 했고
우리 집에 머무는 기간은
지난 토요일까지 만으로
협약이 이루어졌다.
내겐 복종과 감사와 존경의 대상인 아내에게
거부와 타협을 하는
딸이 자랑스럽고 또 부러웠다.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동 베를린의 벽이 허물어지는 걸
보는 느낌이었다.
아내에 대한 항거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는 거구나----->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지만 생각만 하고 실행은 하지 못했다.
인간의 위대함은
생각한 것을 실현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달렸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딸은 위대하다.
다음 날 아내는 '큰 손' 답게
음식재료를 무더기로 사 왔다.
오렌지 한 상자에
사과며 배,
알 굵고 토실토실한 포도까지
갖은 종류의 과일도 넉넉하게 집에 들였다.
과일 좋아하는 나도
딸 덕 좀 볼 것 같아
기분이 풍요로웠다.
그런데 지난 토요일 퇴근해서 보니
집 안 분위기가 여간 쓸쓸하고 허전한 게 아니었다.
딸과 손녀가 떠난 공간이
왜 그리 넓어 보이 던 지.
손녀 Sadie의 모습이 어른거리며
서운한 감정이 올라왔다.
그러나 어찌하랴.
이미 떠난 사람들을 잡을 수도 없는 노릇.
다 마음에서 놓아야지 하며
늘 그러하듯 저녁 식사하는 일에 열중했다.
식사 후, 후식으로
오렌지나 하나 먹으려고
냉장고를 열었더니
찬 바람만 새어 나왔다.
냉장고에서 찬 바람 나오는 거야 당연한 일인데도
그날은 왜 그리 몸서리치게
차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꽉 찼던 냉장고는
썰물 때의 갯벌처럼 허전했다.
"여보, 오렌지 어디 갔어?"
"사과는?"
"소영이가 다 가져갔어요."
도둑들.
이 아빠의 소박한 후식의 희망마저
깡그리 싸 들고 가버린
도둑 딸.
그까짓 오렌지나 사과는
또 사다 먹으면 된다지만
내 마음을 송두리째 훔쳐간 도둑 손녀
Sadie는 또 어찌한단 말인가.
내일은 예쁜 도둑들이나 잡으러 갈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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