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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치지 못한 편지

부치지 못한 편지 (13 )

부치지 못한 편지 (13)

 

LA에서 출발한 여동생은 그 때까지 병원에 도착하지 않았다.

누가 더 오실 분이 더 있냐고 간호사가 물었다.

여동생이 도착하지 않았지만

병원에서  해야할 절차를 계속 진행하라고 했다.

간호사는 사망진단서를 발급하기 위해 다시 분주해졌고

아버지의 시신은 속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Garment Bag같은 것 속에 모셔졌다.

 

어머니는 장례를 담당하는 상조회에 연락을 하셨다.

아버지가 살아계시면서

여기저기 묻고 알아보셔서 이미 돈까지 다 치르셨단다.

 

아버지 마음이 느껴져서

그제서야 마음이 저려왔다.

 

아버지 마음,

돌아가시면서도우리에게 짐을 지우기 싫으셨던 것이다.

 

어머니는 다니시는 능평성당에 전화를 해서

아버지의 선종사실을 알렸다.

우린 그냥 시키는대로 하면 되었다.

장례와 국립 현충원에 안장하는 일은

상조회에서 할 것이고

기도와 미사 등은 성당 연령회에서 다 준비해 줄 것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니 평생의 삶이

무척이나 깔끔하셨다는 게 드러나보이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나를 향했던 마음도 그러하였을 것이었다.

그때는 드러나지 않았어도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내가 나이가 들어서야

비로소 보이는,

그런 마음.

 

집 앞에 자목련이 있는데

봄이면 어른의 주먹보다 큰 꽃송이들이

나뭇가지가 휠 정도로 풍성하게 피어난다.

잎이 다 떨어진 겨울에는

아주 작은 눈들이 나뭇가지에  촘촘히 달려 있다.

겨울엔 아무리 목련나무이고, 눈이 달려 있다고는 해도

그냥 빈 가지일 뿐 볼 품이 없다.

자세히 마음을 써서 보질 않으면

딱히 눈길이 머물 곳이 없을 정도로 초라하기만 하다.

그런데 봄에 꽃을 피우면

그 풍성함과 탐스러움이 내 눈 안에 다 담을 수가 없을 정도다.

아버지 마음은 목련의 눈과 같으셨다.

 

그냥 스치기만 했지 아버지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

눈길을 줄 여유도, 마음도 없었다.

내 마음은 늘 겨울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 마음은 돌아가시고 난 후에야

이렇게 눈이 벌어져 꽃이 피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 목련에 올 봄부터 이상이 생겼다.

꽃송이가 몇 개 달리지 않았다.

나무가 말라 죽어가는 것 같았다.

참으로 이상하게도

아버지와 비슷한 삶을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년 봄, 목련이 제대롤 피어나려나.

꽃이 핀다 해도 꽃을 바로 볼 수 있을까.

 

아버지 마음, 목련꽃.

 

시신을 모시고 갈 앰불런스를 기다리는데

여동생이 병원에 도착했다.

여동생은 비행기에서 마음의 준비를 다 하고 왔는지

비교적 담담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앰불런스가 도착했다.

당직 간호사가 지하 주차장까지 따라와

배웅을  했다.

 

병원 건물 외부까지 나와서 배웅을 하는 것을 보니

우리 아이들이 태어나

병원에서 나올 때가 생각났다.

간호사가 아이를 안고

병원 밖에까지 나와서 아이를 우리에게 넘겨주었다.

혹시라도 병원 내부에서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책임 문제가 따르기에 그리 하는 것 같았다.

 

아무러면 어떤가,

배웅을 하는 간호사의 모습을 통해

아버지가 병원에서 계시는 동안

정성스러운 간호를 받으셨다는 생각이 들어서

내 마음이 흡족했다.

 

하룻 밤을 병원에서 지새며  보았던

그 당직 간호사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따뜻해진다.

그 일이 직업이긴 하지만

일을 일로서 하는 것과

마음을 써서 하는 것의 차이를 내가 왜 모르겠는가.

노안이 와서 육신의 눈은 비록 흐려지긴 했어도

마음의 눈으로 더 잘 볼 수 있음은

오로지 나이 들어감의 축복이다. 

아버지의 자식을 생각하셨던 마음 씀씀이도

육신의 눈이 흐려진

이제서야 보이기 시작하니 말이다.

 

'흰 옷을 입은 천사'라는 표현이 정말잘 어울리는 간호사는

실제로 엷은 핑크 빛 간호사 복을 입고 있었다.

그 핑크 색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따뜻해진다.

사람을 기억하고 알아보는 일에 영 둔감한 나이지만

넉넉했던 마음을 가진 간호사는내 가슴에

영원히 핑크빛 물을 들여놓았다.

 

-나는 사람들에게 어떤 색으로 어떤 느낌으로 기억될까.

나에게 나의 색이라는 것이 있기는 한 걸까.-

 

마침 손님을 태우고 온 택시가 있어서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여동생이 택시를 타고

능평성당으로 향했다.

 

나와 동생은 앰불런스에  탔다.

동생이 운전석 옆에 앉았고

내가 아버지  시신 곁에 앉았다.

시신을 운반하는 차라서 그런지 차의 히터를 켜지 않았다.

아무리 10월초라고는 하지만 아침 공기는 서늘했다.

갑자기 더운 국물 생각이 났다.

하기야 지난 저녁에 깁밥 한 줄로 때우고

하룻 밤을 꼬박 샜으니 시장기가 들만도 했다.

아 , 따뜻한 국 한 그릇이 그렇게 절실한 때가 있었던가.

 

앰불런스는 출근 시간임에도 막힘 없이

매끄럽게 달렸다.

한 삼십여 분 달렸을까, 막 시골티를 벗은 동넷길로 접어들었다.

직감적으로 능평성당에 가까이 왔음을 알 수 있었다.

 

좁은 길 양편으로 상점들과 음식점이 늘어서 있었는데

간판이 세련됨과는 거리가 있었다.

불란서 말로 된 안경점의 간판은

그 동네 분위기와 영 어울리지 못하고 어색하기만 했다.

 

어느 허름한 식당의 출입문에  

'아침 식사됨'이라고

매직 펜으로 성의 없이 쓴 사인이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몸과 마음의 허기가 밀물처럼 몰려 왔다.

그 성의 없어 보이는 사인이

그리운 사람을 만난 것처럼 정다왔다.

 

1980년도 처음 육군 소위로 임관해서  배치 받았던곳이

보병 제 12사단 51연대였다.

원통에서도 툴툴거리는 시외버스를 타고  30분을 더 가야하는

천도리라는 시골에 연대 본부가 있었는데

나는 연대 직할 전투지원 중대에 배치를 받았다.

주위 환경이 척박해서인지

그곳에서 근무하는 군인들의 기본 태도가 툴툴거림이었다.

포장 안 된 자갈길과 낡은 시외버스가 꼭 그 곳 군인들을 닮았었다.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네'라는 말로 설명되는

척박하기만 한 그 곳에서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다 그 성의 없고 세련되지 못한

'아침 식사가 되'는 식당 덕이었다.

 

연대 본부가 있는 천도리엔 약  1KM 쯤되는 상가가 있었다.

대부분이 식당과 여관, 다방 같은 업소로 이루어져 있었고

뒷골목엔 간판이 없는 술집도 꽤 있어서

외출 외박 나오는 군인들에게

나름대로의 위로와 안식을 제공하고 있었다.

.

을 떠나 처음으로 맞은 천도리의 첫겨울은 맵도록 추웠다.

영하 20도는 기본으로 내려가는 추위를

내 혼자 연대 BOQ(독신장교 숙소)에서

군용 매트리스 두 장과 침낭 하나로 이를 부딪쳐 가며 견뎠다.

 

첫 월급이 6만원 쯤 되었던, 정말 쥐꼬리 같던 육군 소위 봉급,

거기에서 사단 경리 장교가 4만원을 떼어

강제로 적금을 들게 했다.

매달, 내 손에 2만원 가량 쥐어졌는데

장교 식당에 한 달 식비를 내고 나면

남는 돈이 만원 쯤 되었다.

그러니 방을 얻을 생각은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대대로 간 동기들은 BOQ애서 잘들 지냈다.

난방이 되는 방에서 잠을 자고,  BOQ 당번병이 해주는 밥을 먹고, 

밤에는 동기들끼리 모여 고추장 푼 라면을 안주 삼아 소주를 마셔댔다.

추위 걱정, 밥 걱정 없이 호강(?)을 했다.

그에 비해 내가 있는 연대 BOQ는 사정이 달랐다. 

방안에 떠다 논 물은 겨우내 얼어 있었다.

난방시설은 되어 있었지만

난방에 필요한 기름은 공급되지 않았다.

-그 기름은 다 어디 갔는지?-

그런 걸 따질 수 있는 권한 같은 건 초짜 소위에게는 애당초 없었다.

고참 중위나 대위들도 어떨 수 없었으니까.

대개 고참 중위와 대위인 연대의 독신 장교들은

겨울이면 밖에 나가 방을 얻어 생활을 했다.

그들은 나보다는 사정이 나았다.

 

평일은 영내에서  숙식을 하니 그런대로 견딜 수 있었다.

문제는 일요일이었다.

갈 곳이,

갈 곳이 내겐 없었다.

 

머리까지 침낭 속에 집어넣고 잠을 잤다.

일어나기가 두려웠다.

얼굴을 침낭 밖으로 내미는 순간

방안의 물을 얼게하는 살기 등등한 추위와

마주하는 일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밤새 내 체온으로 따뜻해진 침낭 곳을 포기하는 것은

또 얼마나 아깝고 안타까웠던지.

밤이 되어 다시 잠자리에 들 때는

얼음장 같은 침낭 속으로 기어들어가야 했다.

결국 나를 침낭 밖으로 끌어내는 건 언제나 허기였다.

나도 그 때는 푸르기만한 20대였다.

추워도 배는 고파왔다.

추위와 허기를 달래준 것은 천도리에 있었던,

'아침 식사가 되는'허름한 밥집이었다.

 

'아침 식사됨'

그 사인은 내게는  구원과도 느껴졌다.

'허름함'이나 '세련되지 못함' - 이런 것들을 따질 수 없는,

그리고 따져서도 안 되는

어떤 고귀함과 절박함 같은 것이 그 곳에 있었다.

 

천도리의 그 밥집에 간판이 있었던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뜨끈뜨끈한 콩나물국에 따뜻한 밥 한 그릇,

그리고 생선 한 토막과  달걀 후라이는

내 허기지고 추위에 언 몸과 맘을 녹여주었다.

 

'아침 식사 됨'이라는 사인이

아직도 내 머릿속에서 펄럭인다.

 

조금 더 가다 보니 코너를 돌면서 사인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순두부 5000원"

 

흰 광목 천에 빨간 글씨의 그 사인은

전혀 세련되지 않은 모습으로,

다른 메뉴들과 함께 바람에 6,70년대 왕대폿집의 그것처럼

무질서하게 펄럭이고 있었다.

 

상주 체면이고 뭐고 다 내려놓고

그 순두부가 너무나 먹고 싶었다.

그러나 아버지 시신을 싣고 달리는 앰불런스를 멈출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분명 "아범아, 순두부 한 그릇 먹고 가자."하고

나보다 앞서서

먼저 차를 세우고 앞장스셨을 것이다.

당신 곁에서 밤을 지샌 아들의 처지를 먼저 헤아리셨을 아버지.

 

그런데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없이 누워 계셨다.

 

지난 2월, 동샹과 함께 아버지를 뵈러 LA에 갔을 때

한국 음식점에서 점심 식사를 같이 했다.

나도 동생도, 아버지도 순두부를 먹었던 기억이 났다.

밥은 두어 숟가락만 뜨셨지만

아버지는 순두부 한 그릇을 천천히 다 비우셨다.

 

앰불런스에서 내려 뜨끈한 순두부 한 그릇 드시면

식은 몸에 다시 따뜻한 피가 돌 것 같았는데---------

마치도 군대 시절 겨울 아침에

'아침 식사가 되는' 허름한 식당에서 먹던

뜨거운 김치 콩나물국 처럼.

 

결국 LA에서 먹었던 순두부가

아버지와의 마지막 식사가 되었다.

 

순두부,

그 순두부 한 그릇.

 

이 지상에서는 말고

언제고 하늘나라에서 아버지를 뵈면

꼭 함께 먹어야 할 것 같은

뜨거운 순두부.

 

어느새 앰불런스는  경사 급한

능평성당의 비탈길을 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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