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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치지 못한 편지

부치지 못한 편지 (12)

부치지 못한 편지 (12)

 

 

아버지가 숨을 거두신 후, 당직 간호사에게 먼저 그 사실을 알렸다.

간호사가 아버지의 혈압을 재고, 

기억은 나지 않지만 몇 가지 절차를 거쳐 아버지의 사망을 확인해주었다.

그리고 얼마를 기다려 종이 위에 사망 시간 같은 것을 적어

아버지 시신 위에 올려 놓았다.

아버지의 공식  사망 시간이 오전  5시 40분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리고 간호사는 당직 의사에게 연락을 했다.

 

그 와중에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병원 밖으로 나가서 전화를 받았다.

아내는 아버지가 숨을 거두시고 얼마 지나서

공항에 도착했다.

내 목소리가 너무 차분해서인지

아버지가 돌아가신 걸 알아차리질 못한 것 같았다.

아버지가 운명하시기 전에 병원에 빨리 도착하는 것이 우선이라 여겼는지

먼저 택시를 잡아타고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아내는 전화기를 택시 기사에게 넘겨 병원 위치부터 확인시켰다.

다시 전화기를 받은 아내는 그제서야 내게 물었다.

 

"아버님은?"

"돌아가셨어."

 

아내는 허탈함과 슬픔으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더 말이 필요 없었다.

 

"빨리 와."

 

빨리 오라고 해서 빨리 올 수 없음을 알지만 딱히 더 할 말이 없었다.

아버지의 임종을 지킨 나나 어머니, 그리고 동생의 그것을 다 합친 양보다

훨씬 더 크고 많은 것처럼 느껴지는

아내의 안타까움과  슬픔이 전화기를 통해 흘러나왔다.

망연자실이란 말이 바로 그런 경우를 두고 하는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 근처에 오면 전화해."

그 말을 마친 후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여섯 시가 지나 당직의사가 와서 아버지의 사망을 공식적으로 확인했다.

아마도 유족들에게 사망을 알리는 공식적인 형식이 있는 것 같았다.

간호사의 메모를 보고 사망 선고를 하는데

중간에 더듬더듬 하다가 다시 했다.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경험이 적은 젊은 의사.

얼마만한 시간이 흐르면 의사 '선생님' 하는 호칭이

어색하지 않은 때가 오는 것일까.

 

청년 장교 시절, '소대장'이란 호칭이 귀에 익숙해진 것이 언제 쯤이었을까?

내가 여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도

한동안 '선셍님'이란 호칭이 영 어색하고 쑥스러웠었지.

설익은 내가 '선생님'으로 불릴 때마다

미안했었다.

스무 해 넘게 선생님을 부르기만 하다가

내가 선생님으로 불릴 때의 그 쑥스럽고 부끄럽던 느낌.

그런데 돌이켜 보면 그 어색하던 시절이 가장 순수하고 열정이 넘쳤었다.

그리고 마음과 태도도 가장 '선생님' 에 가까이 있었던 것 같다.

 

조금씩 호칭에 익숙해지면서

그 호칭에도,

삶에도 먼지가 쌓여가고-----

 

젊은 의사의 조금은 자신 없는 태도가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까지 한 것을 보니

나도 제법 나이테가 늘은 것 같았다.

 

지금도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를 때 가장 자연스럽다.

이십 년 넘게 세탁소를 하면서

때로 사람들이 '김 사장님'이라고 부를 때가 있는데

아직도 귀에 거슬린다.

'사장은 무슨 사장'이라는 조금은 자조의 앙금이 가슴 속에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아무런 수식 없이

그냥 누가 내 이름을 부를 때

가장 편안하다.

그리고 잔잔한 행복도 내 속으로 흘러들어오는 것 같다.

내가 나인 것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 같아서 좋다.

누군가가 나를 호칭이 아니라

이를으로 부르는 사람에게는

'그에게로 가서

꽃이 돠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 때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 병원 근처에 거의 다 왔어."

 

드디어 긴 시간, 긴 거리를 헤치고

아내가 왔다.

아내가 곁에 있으면 느껴지는 포만감.

이렇게 허허로울 때면 아내의 존재가 늘 그 빈 자리를 채워주곤 한다.

 

아내와 함께 서둘러 아버지에게로 갔다.

어내에게 아버지의 모습은 충격이었던 같았다.

아버지를 뵌 지 3-4년이 흘렀고

그 사이에 아버지는

아주 딴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 그도 그럴 것이었다.

더군다나 몇 달 동안 거의 식사를 하지 못하셨으니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관계를 떠나서 아버지의 모습 자체가

슬픔과 고통이었을 것이다.

병원에 있었던 어느 누구 보다도

아내는 슬퍼했고

눈물을 흘렸다.

얼마 후 내가 아내의 등을 감싸 안았다.

"이제 그만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영리한 아내는 내가 어떻게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싶어하는지

알고 있었다.

 

 

 

당직 간호사가 시신을 씼고 옷을 갈아입혀야 하니

밖으로 나가달라고 요청을 했다.

병원 유니폼을 입은 두 여자 분이 그 일을 하기 위해

방으로 왔다.

아주머니 한 분과  아가씨라고 부를 수 있는 젊은 여자였다.

'아주머니는 생활을 위해서라 이런 일을 한다지만

저 젊은 여인은 왜 이런 일을 할까'하는 의문이 머리를 스쳤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꼭 알아야 할 필요가 없었다.

 

누구도 만지기 꺼려하는

시신을 씻기고 옷을 갈아 입히는 일을 하는 그 손.

사람들에게 자신이 어떤 일을 하는 지

당당하게 밝하기가 껄끄러울 것 같은

그 분들의 손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이 아닐까.

 

얼마가 지났을까.

다 끝났으니 방으로 들어오라 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으로 손을 본 까닭인지

아버지의 모습이 바뀌어 있었다.

옅은 하늘색 양복이 입혀져  있었고

얼굴에 화장기도 있는 것 같이 제법 살색이 돌았다.

 

한 달 넘게 계시던 병원을 나서

외출을 나가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벗어버린 환자복.

환자복처럼 아버지를 덮고 있던 고통도 훌훌 벗어버리고

여행을 떠날 때가 온 것이었다.

 

하늘색 옷을 입고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떠나는

하늘여행.

 

혼자 떠나시는 하늘로의 여행길이

쓸쓸하실까.

아니면

모든 것 털고 천국으로 가신다는 설레임으로

소풍가는 아이들처럼 들떠 계실까.

 

어쨌거나 아버지는 이미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지나

우리 곁을 떠나셨다.

 

개천절 아침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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