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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치지 못한 편지

부치지 못한 편지 (9)

작은 이모부내외와 외숙모께서 광수 부부를 따라 집으로 돌아가셨다.

전 날밤부터 꼬박 병원에서 지내셨으니 좀 쉬셔야 할 것이다.

그 분들도 다 칠십 중반을 넘어 팔십으로 가는 그 어디 쯤에

발을 디디고 계시니  육신이 얼마나 피곤하실까.

 

 "먼 길 떠날 때, 가장 멀리까지 배웅나가는 것이 '가족'"이라고누가 말했던가.

 

가. 족.

 

부모를 떠나 서로의 체온이 닿지 않는 먼 곳에서 살아온 시간.

이승을 떠나시는 아버지를 배웅하기 위해 비로소 아버지를 찾았으니

나는 아버지의 가족이고 자식일까.

 

그 분들이 집으로 떠나시고 나니

병원은 더 어둡고 적막해진 것 같았다.

 

드디어 아버지와의 이별을 해야할 차례가 왔다.

 

열 시가 되자 아버지는 기도실이라는 곳으로 옮겨졌다.

환자들을 위해

방문객들이 기도를 할 수 있게 마련해둔 곳이리라.

방문객들이 다 돌아가고 난 후의 기도실은 어둡고 썰렁했다.

언뜻 보니 성경책과 찬송가들이 어지럽게 서가에 꽃혀 있었다.

긴 벤치가 몇.

그리고 앞 쪽 벽엔 십자가가 걸려 있었다.

 

원래 아버지의 입원실은 여러분이 함께 쓰시기에

가족들이 밤을 함께 지샐 수 있도록

병원측에서 배려를 해서 이 곳에 계시게 된 것이었다.

벤치를 방 가장자리고 치우고 아버지를 가운데 모셨다.

벤치는 쿠션이 있어서 하룻밤을 아버지 곁에서 지내기엔 안성 맞춤이었다.

 

그 곳에서 3년 동안이나 미루고 미루며

아버지에게 '부치지 못했던 편지'를 읽어드릴 셈이었다.

그런데 내가 가지고간 노트북 컴퓨터는 배터리가 없어진 지 오래된 데다가

전원의 플러그마저 한국의 것과 맞질 않았다.

동생이 마침  전환용 플러그를 가지고 있어서

라운지에 전원을 연결하고 컴퓨터를 켰다.

그런데 컴퓨터가 켜지는 속도도 느릴 뿐 아니라

인터넷에 연결도 되질 않는 것이었다.

동생 말로는 컴퓨터가 오래 되어서 그러니 

이참에 새로 하나를 장만하라는 것이었다.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는 것인지.

 

급한 마음에 당직 간호사에게 부탁을 해서

병원 컴퓨터를 사용하도록 허락을 받았다.

그런데 병원 컴퓨터도 그렇게 느릴 수가 없었다.

겨우 내 블러그에 접속해서 아버지에게 읽어드릴  글을 찾는데

마음이 급해서인지 도대체 눈에 띄질 않는 것이었다.

 

당황하면 가끔 의식이 블랙아웃이 된다.

더군다나 아버지의 의식이 언제까지 지속될 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에서

더 이상 질질 끌 시간이 없었다.

글 찾기를 포기하고

하릴없이 기도실로 돌아갔다.

그냥 기억을 더듬어 편지 내용을 이야기로 해드릴 셈이었다.

 

언젠가 부모님과 함께 감곡 순례지 성당에 다녀온 적이 있었는데

그 곳 순례지의 카페에 '참 소중한 당신'이 있었다.

그 당시 감곡 성당의 주임이셨던 김웅렬 신부님께서

당신이 먼저 읽으시고 카페에 들리는 사람들을 위해 비치해두신 것이었다.

내 글이 실려 있는 잡지를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발견했을 때의 기쁨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아버지는 일부러 내 글을 찾아 읽으시며

카페에서 일하시는 분께도 자랑을 하셨다.

 

그런 경험 때문에 혹시나 해서

정말로 혹시나 해서 기도실에 있는 서가를 살펴보았다.

서가엔 성경책과 찬송가가 무더기로 있었는데

한 구석에 한 뼘 쯤 되는 분량의

'참 소중한 당신'이 꽂혀 있는 것이 아닌가.

 

심장이 바삐 뛰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 안에 그렇게 간절하고 농축된 기도를 한 적이 있었던가.

'제발, 제발------'

 

기적처럼,

난 거기서 쉽사리 '참 소중한 당신' 2010년 1월호를 찾을 수 있었다.

내 첫 글이 실렸기에 아주 잘 기억할 수 있었다.

카톨릭 신자인 남자 탈렌트의 사진이 표지에 있는 것으로 보아 

내가 그렇게 찾길 원했던 글이 실려 있는 잡지가 틀림 없었다.

 

기적을 믿긴 하지만

나하고는 상관 없이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 현상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간절히 원해서 일어난 작은 기적.

 

난 그것이 기적이라고 믿는다.

기적과 우연의 경계

우연처럼 일어난 일이라도 그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믿을 때

신앙은 시작되는 것이다.

내 이성과 논리 넘어 내가 알지 못하는 영역을 인정할 때

신앙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의 출발점은 겸손이다.

 

어젯밤부터 주무시지 못한 어머니를 옆 방에서 눈을 부치시게 하고

동생과 내가 아버지 곁에 남았다.

 

잡지에서 글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읽는 내내 목이 메었다.

 

동생이 흐느끼는 소리가 간간히 들렸다.

울컥해서 잠시 멈추기를 몇 차례를 반복하고야 

드디어 읽기를 마쳤다.

 

몇년을 부치지 못했던 편지를

임종을 앞둔 아버지께 내 목소리로 읽어드렸다.

 

이런 무심한 아들의 편지를 들으시고

아버지는 무어라고 하셨을까.

 

아버지는 아무런 말씀도 못하시고 

숨소리만 점점 거칠어져 갔다.

동생에게는 벤치에 누워 눈을 부치라고 일렀다.

그리고 난 아버지 침대 곁에 앉았다.

 

이승을 떠나시는 아버지의 길벗이 되드리고 싶었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까지 함께 할 작정이었다.

 

결국 그 날 밤이 일생을 통해

내가 눈을 뜨고 아버지와 함께 했던 가장 긴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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