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enza 일기 - 프란치스코 성당 토요 특전미사
Pienza의 주 성당이라고 할 수 있는 Cathedral of the Assumption에서는
오전 11 시 반과 저녁 여섯 시에 미사가 봉헌된다.
그리고 교황 비오 2 세의 여름 주거지로 건축된 Palazzo Piccolomini를 사이에 둔
성 프란치스코 성당에서는 토요일 오후 6 시에 특전 미사가 봉헌된다.
평소에는 프란치스코 성당의 불이 거의 꺼져 있어서 어두컴컴한데
어제는 미사 시작 10 분 전에 도착해 보니 불이 모두 켜져 있고
신자 20여 명이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묵주기도인 것 같았다.
성당은 성프란치스코 생애 중 중요한 부분이 프레스코화로 벽에 그려져 있던 것이
많은 부분 손상이 되어 있고
제대를 구성하고 있는 돌이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으며
미사 중 사제가 앉는 의자와 천정에 매달러 있는 청동 십자가상이
내 눈에는 특별하게 보였던 곳이다
제단 오른쪽에는 기도실인지 채플인지 작은 공간이 따로 있는 것도
내겐 특별해 보였다.
그리고 다른 곳에 있는 프란치스코 성당을 가보아도
대부분 천정은 아무런 그림이 없이
나무로 돤 대들보와 서까래가 드러나 있는 것 같은데
소박하고 가난한 특징을 보여주는 것 같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리고 성당의 출입문의 높이가 낮다.
나는 국민학교 2학 년 때 처음으로 복사를 했다.
서울특별시 동대분구 제기동에 있는 제기동 성당에서였는데
수녀님들이 제일 어린 복사라고 칭찬이나 격려가 담긴 말씀을 해주셨던 기억이 난다.
복사가 되기 위해서는 라틴어를 한글로 표기한 미사 통상문을 달달 외워야 했다.
사제는 제단 뒤의 십자가를 향해서 미사를 드렸고
미사 경문은 사제와 복사만이 읊었다.
아마도 신자들은 미사 중에 주기도만 함께 외웠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런 미사 형식이 아직도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아직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 같다.
(뉴저지 살 때 옆 집 딸 결혼식 때문에 그리스 정교회에 간 적이 있다.)
내 기억으로는 살던 곳이서 이사를 할 때인 4 학년 초까지 복사를 했다.
나보다 한 학년 위였던 성모 형과 짝이 되어
비가 오나, 추우나 더우나 빠지지 않고
아침 미사 복사를 하러 미사 참례를 다녔다.
(아마 매일은 아니었고 내가 담당이었을 때만 그랬을 것이다.)
아내는 지금도 내가 누리고 있는 많은 은총은 그때의 열심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라틴어 미사 경문을 다 외웠는데 문제가 생겼다.
미사 중 세계적으로 사용되던 라틴어를
나라마다 자신들의 모국어로 바꾸어 쓸 수 있도록 하고
신자들도 함께 미사 경문을 외우도록 바티칸에서 결정을 한 것이다.
그러니 애써서 뜻도 모르는 라틴어 미사 통상문을 외웠는데
말짱 도루묵이 되어버렸고
다시 한국어로 된 미사 통상문을 외워야 했으니
나의 복사 데뷔는 그로 인해 조금 미루어져야 했다.
사실 어린 나에게 있어서 미사통상문 안에 있던
라틴어나 한국어나 무슨 뜻인지 모르기는 매일반이었다.
그 모든 변화가
나에게도 미사 통상문을 다시 외워야 하는 고통(?)을 안겨주었는데
나중에 어른이 되고 조금 공부를 하고 보니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과로 빚어졌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에게도 작은 고통을 안겨준 제2 차 바티칸 공의회는
모르긴 몰라도 전통을 고수하려는
많은 사람, 성직자들에게도 고통을 주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공의회를 통해 교회 안에 흘러 들어온
신선한 공기로 해서 가톨릭 교회는 얼마나 새로워지고
또 얼마나 쇄신이 되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몇 백 년이나 된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는
이탈리아 교회는 미사통상문을 바꾸는 고통도 없이
2차 바티칸 공의회를 맞았으니
얼마나 많은 변화나 쇄신을 했을까 하는
나 혼자만의 의심이 든다.
프란치스코 성인을 비롯해 수도 없이 많은
성인들의 영성을 유산으로 갖고 있는
현재의 이탈리아 교회에는 그냥 빈 건물만 남아 있는 건 아닐까 하는 회의를
이탈리아 곳곳에 있는 성당을 방운할 때마다 갖게 된다.
토요 특전 미사에 온 사람들도 나보다 나이가 많으면 많았지
나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나의 몸도 하느님이 깃드시는 성전이라고 하는데
나도 빈 껍데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미사 중에 했다.
미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이미 날은 어두워졌고
관광객들이 군데군데 거리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보슬비가 살살 뿌리고 있었다.
내일을 날이 좋다는 말에
마음이 갑자기 환해졌던 토요일 밤이 저물고 있다.
다음은 이탈리이 인터넷 사이트에 시린 기사를 구글 번역으로 옮긴 것입니다.
샌프란시스코 피엔자 교회
화려한 피엔차 교회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1182-1226)를 따르는 작은 형제회에 의해 14세기에 지어졌습니다. 종교 사원은 1998년부터 2002년까지 진행된 복원 작업 덕분에 원래의 아름다움을 회복했습니다. 건물은 단순하고 본질적인 선과 성인의 삶을 묘사하는 훌륭한 프레스코화가 특징인 전형적인 프란체스코 교회처럼 보입니다. 오늘날 과거의 회화 작품 중 일부 조각이 측벽에 남아 있고 후진에는 전체주기가 남아 있습니다. 프레스코화는 Malabarba로 알려진 Cristoforo di Bindoccio와 Meo di Pero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두 사람 모두 14세기에 활동했던 시에나 예술가들입니다.
본당의 왼쪽 벽에는 성 프란치스코가 몬테 델라 베르나에서 그리스도의 성상을 받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여러 부분으로 찢겨진 바위 박차는 현대 시에나 예술가 마시모 리피(Massimo Lippi)가 제단을 만드는 데 영감을 준 원천이었습니다. 신성한 테이블은 세레 디 라폴라노(Serre di Rapolano) 채석장(SI)에서 가져온 세 개의 큰 석회화 블록으로 구성됩니다. 이 작품은 하나의 바위를 세 부분으로 쪼개서 만들어졌으며,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땅이 흔들리고 바위들이 깨어졌다"고 말하는 마태복음(27.51)의 구절을 연상시킵니다. 토스카나 예술가는 세 개의 바위 위에 상징적인 낙서를 그렸고, 십자가상을 바라보는 측면에는 모든 인간의 생명을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억하는 얕은 부조를 그렸습니다. 탁자 위, 유리로 보호되는 둥근 홈에 일부 유물이 보입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성상을 받았을 때 입었던 드레스의 실과 성탄 동굴에서 처음 나온 세 개의 바위 조각, 두 번째는 갈보리에서, 세 번째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시모 리피(Massimo Lippi)는 제단 외에도 피엔차에 있는 산 프란체스코 교회를 위해 행렬 십자가, 암보의 불타는 덤불, 마돈나 델 라테와 십자가에 매달린 십자가를 묘사한 얕은 부조 등 화려한 청동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호의 중심. 고통으로 움푹 패인 그리스도의 얼굴 위에는 JHS(Jesus Hominum Salvator)라는 글자와 함께 작은 태양이 빛나고 있습니다. 상징적 요소는 크리스토그램의 "창시자"로 간주되는 프란체스코회 수사인 시에나의 산 베르나르디노(San Bernardino of Siena)의 설교에 대한 찬사를 구성합니다. 그의 설교를 들은 신자들은 마지막에 JHS라는 모노그램이 새겨진 황금빛 태양이 그려진 나무 판에 키스하곤 했습니다.
피엔자 교회 샌프란시스코
피엔차 방문객의 관심을 끄는 또 다른 요소는 연중 언제든지 전시되는 멋진 도자기 성탄 장면입니다. 실제로 Pienza 조각가이자 도예가인 Piero Sbarluzzi가 1989년에 만든 네오로비안 스타일의 작품입니다. 조토에게 바치는 헌사로 디자인된 이 작품은 아시시의 수사가 1223년 크리스마스에 그레치오에서 최초의 예수 탄생 장면을 창조한 인물임을 기억하기 위해 산 프란체스코 교회에 삽입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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