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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이불전쟁 - 공생(共生)이냐 기생( 寄生)이냐

이불 전쟁 - 공생(共生)이냐 기생( 寄生)이냐 blog.daum.net/hakseonkim1561/2412#none

 

소유의 개념이나 분별심이 없는 경지를

우리 부부는 여름에 해당하는 서너 달을 살아냈다.

 

그런데 날씨가 선선해지며 그 순수하던 무욕의 경지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순전히 이불 때문이었다.

 

지은 지가 100 년이 넘은 건물의 3 층 아파트에 산다는 것은

살아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벽돌로 된 건물이 여름날 하루 달아오르면

그 열기는  밤을 지나 다음날 새벽까지도 식을 줄 모른다.

물론 거실에 있는 에어 컨디션의 도움을 받긴 하지만

거실에서 침실까지에 그 시원함이 미치기에는 

힘이 부쳐도 너무 부칠 정도로 부실해서

선풍기를 침실 입구에 배치해서

시원한 공기의 중계탑 역할을 하도록 했다.

그러니 여름 내내 이불은 덮는 용도가 아니라 깔고 자는 요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날씨가 선선해지며 이야기가 달라졌다.

등에 깔려 있던 이불이 어느새 우리 몸 위로 올라왔다.

게다가 우리 침대는 두 사람이 누워 자기에

최소한의 면적밖에 되지 않는 규모라

이불이 한쪽으로 쏠리면

그야말로 추위의 공격에 무자비하게 노출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취약점을 안고 있다.

 

그래서 요즈음 아내와 이불 쟁탈을 위한 전쟁이 치열하다.

 

자다가 추위가 느껴져 눈을 뜨면

이불은 아내 쪽으로 쏠려 있기 마련이다.

가만히 관찰을 한 결과,

아내가 이불 전쟁의 전술로

두 가지를 사용하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었다.

 

그 하나는 '나꿔채기',

다른 하나는 '두루마리' 전술이다.

'낚아채기'는 손목의 스냅을 이용하여 순간적으로

이불을 자기 쪽으로 채가는 전술인데

나로서는 이불을 방어할 수 있는 시간을 벌 틈을 허용하지 않는

장점(나에게는 단점)이 있다.

'두루마리'전술은 아내가 내 쪽으로 접근했다가

자기 위치로 돌아갈 때

몸을 굴리며 이불도 김밥처럼 말아가는 전술이다.

 

'낚아채기' 전술은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

슬그머니 빼앗긴 이불을 내 쪽으로 당기면 그만이다.

그런데 '두루마리' 전술을 쓰면  나로서는 속수무책이다.

아내를 깨우지 않고는

빼앗긴 이불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침대 머리에서 침대 길이의 1/3 지점에

내 머리를 위치시키고

몸을 사선으로 해서 이미 아내의 영역이 되어버린

이불 밑으로 침투하는 수 밖엔 밤을 지낼 도리가 없다.

마치 사람 인( 亻) 자를 뒤집어 놓은 형상으로 말이다.

 

처음 잠자리에 들 때는 숫자 11처럼 동등하게

공생의 상태였으나 자다 보면 공생이 아닌

기생의 상태가 되어버리기 일쑤이다.

 

아내의 이불 밑에 기생하는 신세, 혹은 현실.

 

잠잘 때뿐 아니라 사는 일 자체가

공생이 아닌 기생이 될 수 있는 시간이 멀지 않았다.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두어 차례 미루었던

은퇴의 시간이 눈 앞으로 다가왔다.

내가 만 65세가 되는 2 년 후에

은퇴를 하기로 잠정적으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결혼해서부터 철저하게 안과 밖의 영역을 구분해서

우리 부부는 살아왔다.

부부를 가리켜 흔히 내외라는 말을 옛 어른들이 사용하는데

우리 부부에 대한 맞춤형 표현으로 여겨질 정도이다.

아내는 집에서 집 안을 돌보고 아이들을 키웠고,

나는 집 밖의 일터에서 일을 했다.

나는 아내의 일을 알지 못했고, 알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아내는 내 일에 관여할 틈이 없을 정도로 바쁘고 세밀하게 

나는 나대로 서로에게 주어진 일을 하느라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빼곡하게 채웠다.

 

그래서 나는 집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내가 해주는 밥을 먹는 일이 거의 전부다.

 

그러니 이대로 은퇴를 하게 되면

아내와의 관계는

공생의 관계에서 기생의 단계로 전환될 것이다.

 

부부로 살아가는 일은 기생의 관계가 아닌 

공생의 관계가 이상적일 것 같다.

 

돈이나 지위 같은 것에 셈이 어두워

세속적 능력(?)이 전혀 뛰어나지 않은 내가

아내와 공생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제부터 펼쳐질 공생의 삶에 창조적으로 적응하는 일이 필요할 것 같다.

 

당장 오늘 아침부터 

이불 전쟁의 흔적이 남아 있는

침대 위의 이불부터 내 손으로 정리하리라 고 

손을 꼭 쥐어보는

 

오.늘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