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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가을여행

가을여행

 

잠 속에서 안드레아 보첼리의 노래가 속삭이듯 귀를 간질였다.

 

"당신이 왜 거기서 나와?"

 

잠시 생각을 고르고 나서야 사건의 시말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아팔래치안 산맥 중 한 구간을 아내와 걷기로 했던 것이다.

새벽 네 시에 일어나 눈곱만 떼고 출발하기 위해서 

전 날 잠자리에 들면서 전화기의 알람을 네 시에 맞추어 놓았고,

알람 소리는 내가 즐겨 듣는 인터넷 음악 방송인 판도라 중

안드레아 보첼리의 노래로 마음의 점을 찍어 놓았는다.

전화기는 내가 지정한 시간에 약속했던 음악으로

아주 성실하게 자기 직분을 이행한 것이었다.

 

우리는 군대의 5 분 대기조보다 빠른 속도로 준비를 끝내고 장도에 올랐다.

조지 워싱톤 다리를 건너 고속도로 몇을 갈아타고

아주 어두운 시골길을 달렸다.

어둠 속을 달리다 보니 우리가 걸을 트레일을 표시하는 표지판이 나타났다.

새벽 여섯 시쯤이었는데 불빛도 없는

동네 주택가를 주차 공간을 찾기 위해 헤맸다.

결국 주택가에는 차를 세울 수 없다는 슬픈 결론에 도달했다.

 

동네 어귀에는 주차는

주차증이 있는 차량에 한한다는 경고문이 어김없이 붙어 있었다.

하기야 수많은 사람들이 이 곳에 몰려

주민들도 생활에 지장을 받으니 이해가 아니 가는 바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어둠 속에서 주차 공간을 찾아낼 수 없으니

여간 난감한 게 아니었다.

차를 버려야 새로운 길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불경의 비유가 생각났다.

물을 건널 때는 뗏목이 필요하지만

물을 건너 산을 오를 때는 뗏목을 버려야 하는 법이다.

 

차도 출발 선까지 가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정작 트레일을 가기 위해서는 차가 짐이 되었다.

 

하릴없이 큰길로 나와보니

길 옆에 갓길이 있고

갓길에 주차를 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일등으로 그곳에 도착했고

아무런 사전 정보가 없어서 시간을 낭비하긴 했지만

마음 졸이지 않고 주차가 허락된 공간의 일부를 차지할 수 있었다.

 

편안한 마음으로 차에서 사위 분간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출발점으로 향했다.

 

그리고 큰길에서 50 여 미터를 가니

초원이 눈 앞에 펼쳐졌다.

갈대와 쑥부쟁이, 개망초, 미역취 같은 들꽃과 들풀이

어우러진 가을 들판이 우릴 맞이하는 것이 아닌가.

졸린 눈을 비비고 온 보람이

눈 속으로, 가슴속으로

넉넉하게 흘러들어왔다.

 

가을빛으로 채색된 들판 가운데로

나무로 된 Boardwalk가 길을 열었다.

 

루쉰의 말이 기억난다.

 

"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나의 길,

아내의 길,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한 다리씩을

서로의 다리에 자발적으로 묶고

2020 년 가을길을 함께 걷고 있는 것이다.

 

 

사춘기에 만나서 사추기에 이른 지금까지

우리가 걸었던 길은

앞서서 누군가가 걸었던 길이기도 하고,

때론 우리가 처음으로 열었던 길이기도 하다.

 

우리 뒤에 누군가가 우리의 발자국 뒤를 따라오기도 할 것이다.

 

온갖 들풀과 들꽃이 어우러진 들 가운데 이르니

쑥향 같기도 하고 카모마일 차 같기도 한 향기가

코 안으로 흘러들어욌다,

그 향은 영혼에 느긋한 안식을 선사하는 것 같았다.

 

그 너른 들판의 들꽃과 들풀이 

어우러져 이루어 내는

초원의 빛,

초원의 향기가

봄과 여름을 힘겹게 걸어온 우리에게 

축복을 보내는 것 같았다.

 

2020 년,

가을이 주는 위로와 축복을 원 없이 받았다.

그리고 색깔로 기억되는 가을이

올해부터는 쑥향 넉넉한 향기로 기억될 것 같다.

 

언제고 머지않아 우리는 겨울 여행을 해야 한다.

 

아무리 춥고 바람 불어도

쑥향 넉넉했던 가을을 기억하며

씩씩하게 걸음을 옮길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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