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도둑, 마음 도둑
1일 1화
이것은 요즈음 아내의 가장 중요한 일과를 나타내는 말이다.
여기서 '화'는 두 가지 뜻을 갖는다.
꽃 화(花)를 의미하기도 하고
그림 화(畵)로도 풀이할 수도 있는데
나는 두 가지 의미를 다 품기 위해 한글을 썼다.
무슨 말이냐 하면
아내는 요즈음 하루 하나씩 꽃 그림을 그린다는 말이다.
그것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뉴욕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음식과 생필품을 파는 상점만 문을 열어야 했고,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 꼭 필요한 인원 외에는
모든 사람이 집에 머물러야 했는데
하루 종일 집에 갇혀 있는 것이 답답했던 아내는
한적한 공원을 거닐면서 슬슬 움트기 시작하는
풀과 꽃들을 바라보며 생명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해 돌아오곤 했다.
어느 날 조그만 제비꽃을 보고는
지천으로 피어 있는 제비꽃을 따다가
저녁 메뉴인 비빔밥 위에 수를 놓았다.
그리고 제비꽃 그림을 장난 삼아 그리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붓도 없었다.
물감도 없어서 꽃잎을 으깨어 색깔을 내고
초록색은 시금치를 갈아서 물감을 만들어 썼으니
그 그림이란 것이 오죽했을까?
그렇게 아내의 '1일 1화'가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으깨어진 꽃들은
워낙 어릴 적부터 손재주가 출중했던 아내의 손을 통해
그림으로 재탄생되었는데
처음 그리는 솜씨 치고는 제법 그럴싸해서
나는 말할 것도 없이 우리 아이들 모두 엄지 척을 하는데
주저하지 않을 정도였다.
사진을 보고는 원근감 같은 것을 잘 표현하기 힘들다며
아침 산책길에 본격적으로 거리에 피어 있는 꽃 중
한 송이씩 슬그머니 집으로 모셔오기 시작한 것은
봄이 한창 무르익으며 여러 가지 꽃들이
주택가의 정원과 길가의 화단에 지천으로 피어나기 시작할 때부터이다.
화구도 전혀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그림을 시작하긴 했지만
동네 잡화점에서 3 달러 짜리 물감을 산 뒤로는
꽃의 빛깔이 제법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아내는 자신이 그린 그림으로 카드를 만들어
딸의 생일에,
아들의 결혼 1 주년에,
스승의 날에,
딸과 아들 며느리에게, 그리고 초등학교 선생님께 선물을 했다.
예쁜 꽃에 아름다운 글씨를 곁들인 카드는
주변에 소리 없이 소문이 나서
너도나도 갖고 싶어서 미리 예약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꽃그림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훔치는
꽃도둑, 마음 도둑이 된 것이다.
급기야 3 주 전인가 모든 상점이 문을 열면서
그림도구를 파는 가게에서
드디어 제법 구색을 맞춘 물감과 붓을 구할 수 있었는데
그때부터 아내의 그림은 생명력까지 얻게 되었다.
모셔온 꽃들의 생명이 종이 위에 아름답게,
그리고 생동감을 간직한 그림으로 오래 남게 된 것이다.
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꽃을 훔치는 꽃 도둑이 된 아내의 도벽은
사실 어제오늘 생긴 것이 아니다.
46 년 전 어는 봄날, 나도 모르는 새
내 마음을 훔치고는
지금까지 시치미 뚝 떼고 지내온 아내의 시간.
그녀가 훔친 내 마음은 그녀 속에서 그 시간 동안
어떤 빛깔과 모양의 꽃으로 익고 자랐을는지----
어느 날 퇴근하는 나에게
"여보 여기 내가 모셔온 당신 마음!"
이라고 하며 예쁜 꽃그림 하나
수줍게 내밀 날은 언제가 될까?
https://blog.daum.net/hakseonkim1561/2365#n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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