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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여자의 일생

여자의 일생

 

다음은 며칠 전 우리 식구 페이스 북에 큰 딸이 올린 내용이다.

 

엄마의 손주들을 돌보느라 지쳤다는

큰 딸의 하소연이었다.

잠시 가슴이 찡했다.

 

셋째 손녀 Penny가 태어난 지 6 개월이 지났으니

신생아뿐 아니라 다른 아이 둘까지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서 돌보아야 했으니

엄마로서 얼마나 힘이 들면 이렇게 공개적인 하소연을 했을까?

 

물론 아이들 아빠가 집에 있으니 

이것저것 챙기면서 함께 아이들을 돌보지만

그래도 세세한 것들까지 손길이 가야 하는 것은

아무래도 엄마의 몫이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아니었으면

아내가 가서 아이들을 보아줄 수도 있었으나

사태가 사태이니 만큼 꼼짝할 수 없어서

발만 동동구르는 수밖에 없었다.

 

오죽하면 정부에서 주는 돈으로

텀 플린을 사서

아이들이 거기서 뛰어놀며 힘을 좀 빼어 놓고 싶다고 했을까.

 

큰 딸 때문에 잠시 마음이 아프긴 했지만

나는 딸보다는 아내 생각이 났다.

 

우리 식구는 뉴 저지 집으로 이사 가기 전까지

브루클린의 아파트에서 살았는데

우리 아파트는 11층인가 12 층에 있었다.

막내는 뉴 저지로 이사 간 다음에 태어났으니

아이들 넷과 함께 거기서 살았다.

 

나중에 아내의 고백을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아내는 아파트에 살면서 마음의 병을 얻었다고 한다.

혹시라도 아파트에 불이 나면

어떻게 아이들을 피신시킬까 하는 걱정부터

꼬물꼬물 한 아이들 넷을 데리고

그로서리 쇼핑을 다녀올 때면

혹시 납치라도 당할 것 같은 불안감이 떠날 날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나도 일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

아내를 실질적으로 도와줄 수도 없었고

내 마음을 덜어 줄 여유도 없었다.

 

아이들 키우는 것부터,

요리며 빨래, 집안 청소까지

모든 집안 일이 아내의 몫이었다.

 

아이들이 다 크고 집을 떠난 뒤,

나중에 아내의 말을 듣고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른다.

다행히 뉴 저지 집으로 이사를 한 후에

아내를 떠나지 않고 있던 마음의 병은 스르르 사라졌다고 한다.

 

그러니 큰 딸의 하소연을 들으며 큰 딸의 고통보다는

아내 생각이 더 난 것이다.

아이들 다섯이 모두 혼자 걸을 수 있게 될 때까지

거의 10 년 동안 아내는 밤잠을 제대로 잔 적이 없었다.

물론 외식 한 번 마음 편하게 한 적도 없었으니

여자의 일생이 이렇다는 걸 태어나기 전에 알았다면,

그래서 성별을 선택해서 세상에 나올 수 있는 옵션이 주어진다면

이 세상에 여자는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두 달 이상

아내는 머리 손질할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지난 주엔가 본인 스스로 머리를 잘랐다.

전에는 머리를 자르며 염색을 해서 몰랐는데

흰머리가 꽤 길게 자라서

감출 수 없이 드러나기 시작해서

무심한 내 눈에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흰머리와

눈 가장자리, 그리고 목 주위의 주름이

이젠 아내도 어쩔 수 없이

누가 자신을 할머니라고 공공연히 불러도

항변할 수 없음을 증명해 준다.

 

희생과 사랑으로 가정과 가족을 섬긴 아내,

그렇게 살아온 여자의 일생을 어찌 가벼이 볼 수 있을까?

 

하수영이라는 가수의 노랫말처럼

나는 다시 태어나도

아직도 마를 날이 없는 아내의 손과,

점점 더 늘어나고 깊어지는 눈가의 주름,

그리고 늘어나는 흰 머리카락을 사랑할 것임을 다짐하고

또 다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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