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쟁이 둘째 딸의 살아가는 이야기
지난 주 주중에 재택 근무 중인 둘째 딸에게서 문자를 받았다.
"Hi umma and appa, next monday i will start to go into work.
Governor Cuomo designated my hospital (Downstate) as a Covid-only hospital
so we are going to be treating coronavirus patients for a long time.
Even after the pandemic has slowed down,
we are continuing to operate as a covid hospital and will be taking in patients from brooklyn hospitals.
자기가 다니고 있는 병원이 코로나 바이러스 전용 병원으로 지정되었으며
현재의 위험한 사태가 지나가도 부르클린에 있는 다른 병원으로부터
코로나 바이러스 환자를 계속 받아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문자는 이어졌다.
자기는 앞으로 응급실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해서
어떤 환자는 살아나고,
또 어떤 환자는 죽어가는지에 대한
유전적인 특징에 관한 연구를 할 예정이라고 했다.
직접 환자를 치료하지는 않아도
딸 아이가 확진 환자들 사이에서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나는 자랑스러움과 함께 적지 않은 걱정거리 하나를 떠 맡게 된 셈이었이다.
딸 아이의 마음을 헤아려 보았다.
다른 동료도 있지만
딸 아이는 그 일을 자원했다고 한다.
할머니와 함께 사는 동료를 대신해서,
그리고 아이를 키우는 동료를 대신해서
비교적 가족에 대한 의무가 가벼운 자신이 그 일을 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내가 비록 아이들에게 사회에 대한 의무감을 말 하며 살아왔지만
막상 딸 아이가 그런 결정을 내리니
걱정거리 하나를 내 가슴에 얹어놓은
딸 아이에 대한
야속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대놓고 자랑은 하지 않아도
육십이 넘는 세월 동안
나름 남에게 뒤지지 않는 건실한 삶을 살았다고
제법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가볍고 알팍한 지를 마주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둘째는 어려서부터 정도 많고 배려심도 부족함이 없었다.
오 학년 때인가, 육 학년이 되었을 때인가
둘째 딸은 장래 희망을 말하면서 의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의사가 되어서 아픈 사람들의 병을 낫게 해주고 싶어서'라는 게
그 이유였다.
특별히 정신과 의사가 되어 정신과 마음이 아픈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정신과 의사과 되고 싶어 했다.
우리가 살던 건너편 집에는
변호사로 은퇴한 할아버지와
집에서 정신과 의사로 집에서 진료를 하시던 할머니 부부가 살고 계셨는데
그 할머니 의사의 영향도 조금은 있었을 것이다.
그 할머니 의사가 진료실로 쓰던 방에서는
언제나 음악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둘째의 희망은 은근히 바뀌고 말았다.
막연히 의사가 되겠다는 희망을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아주 커다란 장애를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어떤 의사가 되든지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피를 봐야 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의사가 되기 위해서 의대 과정에서 거쳐야 하는
해부학 같은 과정에 무한한 공포를 상상 속으로 하게 되었고,
피도 뽑아야 한다는 사실 등등을 알게 된 이후
겁 많은 둘째에게는 의사는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되고 말았다.
그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
정신과 의사는 그런 일과는 관게가 없는 줄로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꿩 대신 닭'이라고
정신과 의사 대신 택한 것이 심리 상담가였다.
그리고 심리 상담가로서의 과정을 열심히 밟아서
뉴욕 주 심리 상담가 자격을 획득했다.
'SVA(School of Visual Art)에서
학생들 상담 및 심리 치료를 하면서
시간이 될 때는 개인 상담도 하다가 자리를 옮겨
현재는 뉴욕 주 소속의 심리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자기 직장 일을 하면서
오레곤 주를 왕복하면서 상담 박사과정을 마치고
현재는 박사 논문을 준비하고 있는데,
지역사회 봉사활동을 비롯해서
자기가 몸 담고 있는 사회를 위해서
얼마나 바쁘게 사는 지 알 수가 없다.
대학원 생들 온라인 강의까지 하면서
코로나 사태 때문에 요즈음은 재택 근무를 하는데
비는 시간을 이용해서
움직일 수 없는 노인들이나 환자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어 배달하는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그리고 병원에 마스크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는
작은 재봉틀을 사서
자기 남편과 함께 마스크를 만들어 병원에 보내는 일을 하고 있다.
어디 그 뿐인가.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 바이러스로 비참하게 죽어가는데
그들에게 위로를 줄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는
환자들에게 작은 위로가 될 수 있도록
병원의 병실의 벽에 그림을 보내는 일도 하고 있다.
(실제 연구 결과 예술 작품이 그런 환자들에게 많은 위로를 준다고 한다.)
SNS를 통해 그림을 모으고
자기가 일하던 예술 대학 관계자에게도 편지를 써서
병원에 그림 보내는 운동을 하고 있는 중이다.
오늘도 파스타를 만들어
음식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배달한 모양이다.
내일부터 병원으로 출근하는 딸 아이를 위해
아내는 립 스틱으로 하트를 그리고 마커로 글을 써서
격려 카드를 만들었다.
윌리암스 버그 다리를 걸어서 건너며
해가 뜨는 하늘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 딸에게 보냈다.
딸에게서 답장이 왔다.
'씩씩. don't worry about me! (나는 씩씩하니 걱정 마세요!)'
아, 겁쟁이 지영이는
어느새
나보다도 키가 훨씬 큰 어른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내용물 소개- 이탈리안 소세지와 페퍼를 넣은 파스타 - 모두 오르가닉 제품을 사용했습니다.
한국산 봉지 커피가 인기가 많다네요.(뜨거운 물만 부어서 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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