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와 함께 걷는 길 - Auvers Sur Oise
시골 영감의 기차놀이는 늘 어떨떨하고 긴장감이 감돈다.
특별히 언어가 낯선 곳에서 기차를 타는 일은 여간 힘이 드는 것이 아니다.
말이 서툴고 글자가 낯이 서니
일단 방향을 잡는 일이 보통 헷갈리는 게 아니다.
그 전 날 우리는 노르망디 지방을 다녀왔는데
새벽 6 시 반에 출발해서 하루를 보내고
새벽 세 시가 다 되어서야 호텔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 날은 조금 늦게 일어나 파리 근교에 있는
Auvers sur Oise라는 곳을 찾아가서 한나절을 보내기로 했다.
그 곳은 화가 고호가 삶을 마감한 곳인데
느긋한 발걸음으로 고흐를 추억하며 걸어다니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었다.
호텔을 나와 두어 블록 떨어진 곳의 지하철 역에서
목적지로 가는 기차역까지 가는 데도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기차역이 있는 지하철 역에서 내려
지상으로 올라왔음에도 기차역은 보이지 않았다.
지하철 역과 기차역 이름이 공히 'Invalides'역이었다.
나폴레옹의 무덤과 로뎅 박물관이 있는 곳인데
밖으로 나와 보니 아주 낯이 익은 곳이었다.
그 곳을 다녀온 지 7- 8 년이 되었음에도
모든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방향을 잡지 못한 채 서성거리다
마침 그 곳에 서 있는 관광버스 기사에게 기차역의 위치를 물었다.
기사는 자신의 전화기로 검색을 한 뒤에
길 하나 건너면 기차역이 있다고 가르쳐주었다.
그런데 길을 건너긴 했는데 기차역은 보이지 않았다.
자세히 관찰을 하다 보니
큰 건물 옆 쪽으로 경사진 길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이 띄엄띄엄 오르고 내려가는 모습이 보여서
직감적으로 기차역이 지하에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기차역은 서울역처럼 지상에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생각을 굳히고 갈 길을 막아선다는 교훈을 다시 얻었다.
지하로 내려가 보니 제법 번화한 기차역이 나타났다.
역의 안내 창구에서 어찌어찌 표를 구입했는데
기차를 타야 할 플랫폼을 찾는 게 영 힘에 버거웠다.
낯선 문자와 생소한 지명이 어우러져
행선지를 찾는 일이 숨은 그림 찾는 것처럼 눈과 마음을 혹사했다.
겨우 플랫폼을 찾아 가니 기차 시간이 3-4 분 밖에 남지 않았다.
확신이 서지 않아 마침 옆에 있던 아가씨에게
우리가 목적지에 맞는 방향과 위치에 있는지를 확인했다.
미국 캔자스에서 왔다는 예쁜 (아마 도움을 주어서 그렇게 기억할 수도---)아가씨가
인터넷 검색을 하더니
맞다고 알려주어서 그 다음부터는 마음을 놓고 기차를 기다릴 수 있었다.
우리가 탄 기차는 일종의 교외선 같은 성격을 가졌는데
이층으로 되어 있었다.
출근 시간이 지나서인지 기차 한 칸에 서너 명의 승객 밖에 눈에 띄지 않았다.
(아니 이러면 적자가 많이 날 텐데---)
내 코가 석자인데 참 걱정도 팔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차역을 출발하고 서너 역을 지하로 가던 기차는
지상으로 올라갔고 곧 쎄느 강을 건넜다.
강을 건너는데 에펠탑이 눈에 들어왔다.
에펠탑 빼고는 별로 새로울 것도, 신기할 것도 없는
그런 풍경들을 차창으로 흘려 보내며
한 시간 정도 가니 우리가 내릴 역에 도착했다.
그런데 우리는 가는 도중 잠시 위기 상황을 맞았다.
중간에 아내가 구글링을 하더니 목적지 한참 전에서
내려야 한다고 주장을 했다.
나는 전화기에 깔아논 번역 앱(Application)에
우리의 목적지가 얼마나 남았냐고 입력을 한 후,
우리 빼고 기차 안에 남아 있는 한 승객에게 다가가 보여주었더니
아직 15 분 정도 더 가야 한다고 알려 주었다.
물론 완벽한 눈치로 알아들은 것이긴 했으나
15라는 숫자의 불어 정도는 해독할 능력이 있는
내 불어 실력이 가져다 준 기쁜 소식이었다.
평소에 신념처럼 믿고 따르는 아내의 말이지만
나도 할 말은 하고 사는 신념의 남자일 때가 아주 가끔 있어서
아내의 말에 반기를 들기도 한다.
그 날은 내 신념이 빛을 낸 경우이긴 했으나
나는 쿨하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속으로 통쾌해 할 뿐이다.)
살아가면서 몇 승 몇 패를 기억하는 건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허구한 날 KO패를 당하더라도'
어퍼 컷 한 방 날린 빛나는 기억 하나면
인생을 살아가는 데 충분한 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목적지로 가는 기차로 갈아타야 했는데
잠시 시간이 남아 기차역 밖으로 나가서
10 여분 동안 동네를 거닐었다.
그 곳 마을은 인도계와 아프리카 시림들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고향을 떠나 자기의 언어가 아닌
이민족의 언어를 쓰며 살아가는 이민자의 고단함과
그런 것들이 만들어 내는 어색한 풍경이 마음에 맺혔다.
내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동질감 같은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서둘러 기차역으로 돌아와서 기차를 기다리는데
달랑 둘 밖에 없는 플랫폼이
하나를 찍어야 하는 사지선다형 문제처럼
스트레스가 되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겨우 방향을 잡고 기차에 오르고 나서야 걱정된 마음을 내려 놓을 수 있었다.
시골 영감의 기차놀이는 그리 유쾌하지만 않은 것이다.
기차는 신형이어서 아주 쾌적했고
서울의 지하철처럼 모니터에 나오는 역을 하나하나 추적해 가다 보니
우리가 내려야 할 역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지금 기차역에 내리던 그 순간을 돌이켜 보니
마치 'Mission Impossible'을 당당하게 완수한 것 같은 뿌듯한 느낌이 든다.
'Auvers Sur Oise'
그곳은 아주 한적한, 그런 전형적인 시골마을이었고,
또 그런 시골역이었다.
고흐가 거기서 죽지만 않았으면
이방인의 발길이 거길 향할 이유가 전혀 없는 곳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고흐는 죽기 직전 그 마을에 들어가
70 여일을 살았고,
그 70 일 동안 80 여점의 작품을 그렸다고 한다.
생의 마지막 두 달 동안
정신적으로 그리 건강하지 못 했던 고흐는
미친듯이(아니 미쳐서)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정말 불꽃처럼 마지막을 불태우고 간 고흐,
그 외로운 사내의 발자국을 따라
바람이 된 그와 손을 잡고 걷는 길.
역에서 걸어서 2-3 분 거리에 있는 고흐 마을 안내소에 잠시 들렸다.
(무료 화장실이 친절하게도 본건물 옆에 있다.)
지도를 한 장 얻어 걷기 시작했다.
그 마을 곳곳이 작품의 배경이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저 내 눈에는 평범하게 보이는 풍경들이
고흐의 눈을 통해 그의 정신 속으로 들어갔다가
손에 쥔 붓끝으로 다시 나올 때,
새로운 풍경이 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고흐가 마지막 두 달을 조금 넘게 살았고,
죽음을 맞았던 '라부' 주막을 지나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구름이 하늘을 8할 가량 덮고 있었다.
우리가 걸었던 길은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곳이었다.
고흐의 마음이 되어 보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나에 있어서 고흐는 학창 시절의 친구를
40 몇 년만에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얼굴은 스쳐서 알지만 같은 반을 한 번 한 적 없는 친구 같은 존재였다.
그래도 검은 뿔테 안경 때문에 잊을 수는 없는 그런 친구 같은 존재.
알기는 알아도 정작 자신 있게 아는 친구라고 할 수는 없는
그런 거리에 고흐는 있었다.
그럼 슬슬 걸어보기로 하자.
Invalides 역 근처에 있던 관광버스.
기사가 친절하게 기차역을 알려 주었다.
프랑스 사람 불친절하다는 건 옛말, 혹은 편견이다.
지하 철길을 나와 얼마 되지 않아 나타난 에펠 탑.
그러고 보니 지하에 에펠 탑 역이 있었던 것 같다.
기차의 좌석과 등받이 커버
색이 참 명랑하다.
프랑스적 칼러와 무늬라고 해도 될 것 같다.
모니터에 보이는 우리의 목적지 'Auvers sur Oise'
특정 지역을 왕복하는 이 기차에는 칸막이가 없다.
거의 빈 차로 운행되어 또 한 번 나를 걱겅하게 만들었다.
Auvers Sur Oise 역.
시골스러움,
전혀 세련되지 못함-----
지하 통로
어둠 속에서도 해바라기는 빛이 난다.
역사에 있는 낡은 기차,
그 안에는 책들이 보관되어 있는 것 같다.
언뜻 책이라는 뜻의 'Livre'라는 단어를 기차 벽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기차의 색이 노란 것도 고흐의 해바라기와 연관이 있는 걸까?)
안내소 뜰의 고흐 동상.
화구를 메기에도 힘이 겨웠을 것 같은 애잔함이 묻어나는 동상.
우리는 마을 한 바퀴를 돌고 난 뒤,
동상 앞 벤치에 앉아서
길 건너 편 빵집에서 산 바게뜨 하나와 다른 케익 한 조각으로 점심을 먹었다.
전혀 호화롭지 않은 점심이었지만
고흐에게는 조금 미안한 느낌이 들었다.
평생 그림 한 점 밖에 팔아 본 경험이 없는 고흐에게
빵 한 조각의 의미는 아주 심각했을 것이다.
내 팔 길이만 한 바게뜨가 0.9 유로.
사람들은 거의 쉴 틈 없이 이 빵집 문을 열고 닫았다.
고흐의 동상 옆에 있는 고목.
부분적으로 껍질이 벗겨진 이 나무의 결.
마치 고흐 그림의 힘 있는 곡선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이 나무는 고흐와 만난 적이 있을 것 같다.
안내소 건너 편, 역이 있는 방향에 있는 Auvers 시청.
시청이라고 번역을 하지만
읍 사무소 같은 개념일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Gogh의 그린 그림과 실제의 모습을 함께 볼 수 있다.
고흐가 생애 마지막 70 일을 살았고
또 죽음을 맞았던 라부 주막.
초콜렛 파는 가게인 것 같은데
여기도 해바라기를 로고로 사용했다.
초콜릿과 해바라기는 도대체 무슨 관계임?
주막 앞 테이블의 와인과 와인잔
주막집 딸을 그린 그림?
자신이 없긴 하지만 고흐가 죽었을 때
주막집 딸이 열 세 살인가 그랬다고 하지, 아마도.
그녀가 일흔 몇 살에 증언한 바에 따르면
고흐가 총상을 입고 자기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는데
바로 죽지 않고 하루를 더 넘긴 뒤에
소식을 듣고 달려 온 동생 품에 안겨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결국 고흐가 자살을 했다고 알려졌지만
많은 의문점이 남아 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라는 말을 되새길 뿐 ----
골목 어귀의 전봇대,
그 위의 무슨 표시.
노란 색이 그냥 노란 색일 따름임에도
이 마을에서는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고흐가 골목과 그 끝에 있는 계단을 그렸다.
아주 평범한 나무 계단.
그림 속에는 계단이 끝나는 곳에 집이 있는데
우리가 갔을 때는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그림을 그릴 때의 계절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골목이 끝나는 곳에 있는 큰 집.
화가 도비니가 살았던 집인데 지금은 그의 뮤지엄으로 쓰이고 있는 듯.
뜨내기 가난뱅이 고흐와는 달리 제법 살았던 것 가다.
고흐가 살던 곳에서 걸어서 채 일 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
그러나 이 곳 Auvers를 찾는 사람은 도비니보다는 고흐 때문일 것이다.
내가 본 중에 이 집에 들어간 사람은 아내가 유일하다.
그것도 사진을 찍기 위해서---
낡고 허물어진 나무 계단.
이 모든 것이 고흐에게는 평범하게 보이지 않았다.
계단을 오르자 호젓한 길이 나오고
거기 어느 집에 접시꽃이 피어 있었다.
도종환 시인의 '접시꽃 당신'이 생각났다.
길이름이 표시된 돌.
예사롭지 않게 보였다.
'머리에 꽃을 꽂은 여인(?)'
바로 나의 '접시꽃 당신'
도종환 시인의 접시꽃 당신과 나의 '접시꽃 당신과는 참 거리가 먼 상황이긴 하다.
그러나 시간의 길이에는 차이가 있을지언정
언젠가는 확실하게 이별의 순간을 맞아야 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상황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 놓을 순간은 언제고 꼭 올 것이다.
그 시 구절 중 참으로 절절한 내용을 인용한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최선의 삶을
살아온 날처럼, 부끄럼없이 살아가야 한다는마지막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압니다
우리가 버리지 못했던
보잘것없는 눈높음과 영욕까지도
이제는 스스럼없이 버리고
내 마음의 모두를 더욱 아리고 슬픈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날들이 짧아진 것을 아파해야 합니다
남은 날은 참으로 짧지만
남겨진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듯 살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
있는 힘을 다해 맞서는 길입니다'
골목길을 가다 보니 Auvers 성당이 나타났다.
낡고 허물어져 가는---
그래서 보수가 필요한 쇠퇴한 건물.
성당 건물은 보수 중이었고,
간이 화장실이 칸막이 옆에 눈치없게 서 있었다.
사진에 찍힌 화장실을 그냥 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 잘라 버렸다.
고흐를 기억하며----
까마귀가 나는 밀밭의 배경이 된 바로 그 장소.
밀밭은 없고 노란 풀꽃과 잡풀이 밀밭에 넘쳐났다.
우리는 성당 옆길로 난 오솔길을 따라 이 곳까지 왔다.
언뜻 보면 길이 막힌 것 같아도
호젓한 길이 나 있었다.
아마 고흐가 이 곳에 올 때도 큰 길보다는 이 길을 걸었을 것 같다.
옥수수 나무는 키를 넘게 자랐는데
수확할 생각을 않는다.
가끔씩 너무 익어 알갱이가 딱딱해진 옥수수가 얼굴을 내밀고 있다.
고흐가 묻혀 있는 공동묘지의 담장.
밀 추수가 끝난 빈 들판,
까마귀 몇 마리.
우리에게도 그 날이 올 것이다.
거기엔 고흐의 죽음도 있고,
그보다 더 오래된 죽음도 있다.
고흐의 무덤 바로 건너 편에는
아주 잘 생긴 생생한 청년의 죽음이 잠들어 있다.
사진 속 청년의 잘 생긴 얼굴 때문에
흐린 하늘 아래 공동묘지가 밝아진듯한 착각을 했다.
고흐의 무덤,
그리고 옆에는 동생 테오가 나란히 묻혀 있다.
동생 테오는 고흐에게 아버지였고 후견인이었으며
그리고 어머니였다.
고흐가 죽고 6 개월인가 뒤에 동생도 따라 죽었다던데---
삶은 무엇이고 또 죽음은 무엇이지----
'삶은 한 조각 뜬구름 일어남이요 / 生也一片浮雲起 생야일편부운기
죽음은 한 조각 뜬구름 스러짐이니 / 死也一片浮雲滅 사야일편부운멸'
마침 하늘에 짙은 구름이 낮게 드리웠다.
무덤 위의 해바라기
누군가가 놓고 갔다.
잘린 꽃은 금방 시든다.
동생 테오에게 형 고흐는 평생 짐이었을 것이다.
그 짐을 벗어서 자유로워진 것 같은데도
6 개월 후 형을 따라 저 세상으로 간 테오.
이런 것이 삶의 아이러니다.
성당으로 오르는 길에 있는 화가 도비니의 동상
큰 길로 나오니 어느 집 문 기둥에 고흐의 얼굴이 보였다.
세라믹에 그려진 고흐의 얼굴.
아마 그 집도 고흐의 그림 중 하나에 나올 것이다.
기차역 지하도
고흐가 마지막 삶을 살다가 생을 마친 마을,
Auvers Sur Oise를 걷고 돌아오는 길에 문득
도종환 시인의 시 접시꽃 당신의 첫머리가 떠올랐다.
'옥수수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나는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이 참으로 짧다는 사실을 잊고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적어도 알고는 있지만 자주 꺼내어 친근하게 살피지는 않는 것 같다.
고흐의 마지막 70 여일의 삶을 살았던 마을을 걸으며
그 70 일 동안 죽을 힘으로 그렸던 그림을
나는 기억하려 한다.
그리고 나는 고흐의 무덤으로 가던 길에 만난 접시꽃을 기억한다.
그리고 어둔 구름이 덮여 있던 고흐의 무덤을 둘러 보며
이미 죽은 이들의 죽음과
아직 살아 있는 자들의 죽음을 기억하려 한다.
어차피 삶이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났다 스러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 생멸의 사이,
접시꽃 한 송이 피워내는 일의 소박하지만
찬란함을 기억하려 한다.
하루하루 흘려보내는 시간이 아니라
죽을 힘을 다 해
'기꺼이 살의 어느 부분도 떼어주고 가는 삶을
나도 살다가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날.이. 기.울.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gMSoZyqSl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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