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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머리 깎던 날

머리 깎던 날


서기 2019년 5월 12일.

이 날이 뭐시 그리 중허냐고?


어머니 날.

축구하는 날인데 비 때문에 축구 못 한 날.

주일.


그리고 이발소에 가서 머리 깎은 날.


어머니 날은 매 년 한 번씩은 잊지 않고 돌아오고,

비 때문에 축구 못 하는 날도 심심치 않게 있으며

주일도 일 년에 쉰 몇 번을 꼬박꼬박 맞이하지만

내가 이발소에 간 것은 십 수 년만의 일이기 때문에

그리 그 일요일이 그리도 중헌 것이다.


내가 미국에 와서 이발소에 간 것은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이다.

먼저 이민 와서

너무 바쁘게 일 하느라 시간도 없었고,

이발소까지 갈 차도 없었서

아내의 손에 내 머리를 맡겨야 했다.


아내 앞에서 맥을 못 추기 시작한 것도

얼추 아내에게 내 머리를 깎이면서부터인 것 같다.

내 경우로 비춰 보자면

구약의 삼손 이야기도 사실에 근거했다는 추론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내 머리에 손을 댄 사람이 또 한 명 있었는데

내 남동생이다.

군에 갔다가 복학하기 전에

일 년 동안 어학연수 차 우리 집에 한 해 동안 머물렀던 적이 있었는데

워낙 손재주가 뛰어난데다가

공군으로 군생활을 하면서 부대원들의 머리를 깎아주던 실력으로

내 머리를 일 년 동안 매만져주었다.


그런데 어느날 머리를 깎고 보니

귀 윗 쪽으로 머릿 속이 휑하니 들여다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갑자기 생긴 탈모인지

아니면 점차적으로 탈모가 진행된 것인지는

자료도 부족하거니와

목격자들의 기억도 희메해서

지금으로는 밝혀낼 수 없는 미스테리로 남게 되었다.


워낙 주변머리가 없는데

머리까지 주변머리가 없어지고 마니

명실상부 나는 주변머리가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십 수 년 전에 동네 미장원에

한국 미용사 한 분이

내 머리 특성을 고려해서

몇 달 동안 머리를 깎아주었으나 어디론가 자리를 옮긴 다음부터

내 머리는 주구장창 아내의 차지가 되었고

그런 상태로 십 수 년이 흘렀다.


그리고 지난 일요일에 이발소에 갔는데

그것은 입넌 토요일에 결혼하는 아들의 간곡한 요청 때문이었다.


모든 것이 완벽한 결혼식에

아빠 머리 스타일 하나가 문제가 되는 것처럼

자기랑 머리 깎으러 같이 가자는 요청을 한 것이

한 달전 쯤이었다.


아들 결혼이라고 크게 하는 일도 없는 내가

그 정도 부탁도 안 들어주면

천인이 공노해도 뭐라 변명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십 수 년전 아들 둘을 데리고

머리를 깎으러 다녔는데(나는 머리를 깎지 않았다.)

이젠 아들이 나를 데리고 이발소를 다녀온 것이다.


이발소에 가기 전에 아들에게 다짐을 했다.


"네가 가자고 해서 가는 것이니 이발비는 네가 내는 거지?"


그리한다는 확약을 받고 우리는 출발을 했다.

아빠와 아들 사이에도 계산을 확실히 해 두어야 한다는 교훈을

은연 중 아들에게 전달한 것이다.


젊은 이발사는 맵씨 있고 무사하게(?)

주변머리를 다치지 않은 채 내 머리를 깎아 주었다.

내 지갑을 여는 수고 없이 머리를 깎았으니

도랑치고 가재 잡고,

꿩 먹고, 알 먹고,

마당 쓸고 돈도 줍는

쾌거라 아니할 수 없었다.


그리고 서 있으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다고

한 가지 욕망이 더불어 똬리를 트는 것이 아닌가.


십 수 년 동안 아내가 내 머리를 자르는 동안

어찌 된 영문인지

나는 아내 앞에서 사족을 쓰지 못 했는데

이 번엔 남자 이발사가 머리를 깎아주었으니

양기를 받아 내 안의 야성이 다시 살아나서

당당히 아내의 전횡에 맞설 힘이 생겨나길 은근히 바라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머리가 다시 자라 머리 깎을 때가 되었을 때,

아내가 머리 깎자고 하면

털 깎이는 순한 양처럼 아내가 권하는 의자에 앉을 것인지,

아니면 

"내 머리는 내가 알아서 해!!!"

하며 문을 밀치고 나오는 용기를 낼지

나도 자못 궁금하게 기다리는 중이다.


이러다가 주변머리도 없는데

속알머리까지 없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도 하면서 말이다.




Before and After를 위해 머리 깎기 전

집에서 거울 보고 한 장





머리 깎고 이발소에서 한 장




이발소 안에 큰 개가 한 마리 있는데

손님이 올 때마다 문까지 나와 무표정하게 맞이하고

제 자리로 돌아간다.


일종의 얼굴 마담.


그리고 자기 일이 끝나면 또 잠.

개팔자라는 말의 어원이 이 개로부터 생겨난 것 같음











이발사 Brian


머리를 깎으며 아들과 대화를 하는 걸 들으니

화제도 다양하고 그리 싹싹할 수가 없다.






Brian은 아들 머리는 공짜로 깎아주었다.

결혼 선물이라고 했다.


허투루 깎지 않고 손길에 정성이 배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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