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소에서 생긴 일 - 진상과 치매 그 사이
어제 아침 크리스티나 할머니가 씩씩거리며
세탁소 문을 밀치고 들어왔다.
"John, you gave me wrong coat."
지난 토요일에 검은색 레인 코트를 찾아갔는데
자기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크리스티나 할머니는 우리 세탁소의
20 년도 넘는 단골손님인데
늘 입에 불평불만을 달고 산다.
5 년 전 은퇴하기 전까지는
세탁소에 와서는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험담과
일 하는 환경에 대해 같은 내용의 불평을
무한 반복 재생을 했다.
처음엔 맞장구를 쳐 주었다.
그러면 힘을 얻은 크리스티나 할머니의 불평은
끝이 없이 계속되기 마련이어서
작전을 바꾸었다.
"오늘은 젊은것도 아니고 어쩌면 그리 어려 보일 수가 있느냐."
아니면 평범한 옷을 입었음에도
"패션 감각이 남다르다."
등등의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맘에도 없는 칭찬을 늘어놓았다.
조금 잠잠한 것 같더니
은퇴한 뒤에는 돈도 없는데 세탁비가 과도하게 비싸다는 등등의
신종 불만이 터져 나왔다.
일을 마치고 세탁소 문을 나설 때면
"다시는 이 세탁소에 오나 봐라"라는 말로
장엄하게 세탁소 방문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크리스티나 할머니의 가족 관계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으나
평생 독신인 것 같다는 심증이 드는데
평소 자식이나 손주들 이야기를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고
일부러 물어보지도 않았다.
불평할 시간도 턱없이 모자라는데
자식들 이야기까지 할 여유가 없어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만약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그 또한 충분히 이해가 될 정도라고 한다면
그녀에 대한 이해가 대충 될 것이다.
그래도 최근에는 내 칭찬빨이 약효가 나타났는지
한동안 제법 귀여운 반응을 보여서
'우리 사이좋은 사이'로 발전한 것으로만 알았는데
결국 어제의 사단이 생기고 말았다.
크리스티나 할머니의 주장으로는
그 코트가 자기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는데
나는 일단 정신을 집중해서
밑도 끝도 없는 그녀의 불만을 파악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이런 일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일 년에 한 건 정도 발생할까 말 까다.
먼저 컴퓨터에 남아 있는 그녀의 기록을 살펴보았더니
분명 까만색 레인 코트가 그녀가 가져온 것이 맞았고
보통 길이보다도 더 길어서 'Long'이라는 메모까지 남겨져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코트 앞 쪽의 단추 2 개가 없었는데
그녀가 단추를 달아달라는 부탁을 해서
똑같은 단추가 없으니 소매 밴드에 달려 있는 단추 두 개를 앞 쪽에 달고
비슷한 검정 색 단추를 소매에 대신 달아주겠다고 했던 기억이 났다.
그랬더니 그녀는 아주 좋은 생각이라고 흡족해하며 박수까지 쳤었다.
그 모든 기록이 남아 있어서 그걸 보여주며
그 코트가 분명 당신의 것이라고 했더니
그제야 목소리 톤이 조금 낮아졌다.
그러고도 한 동안 세탁소를 떠나지 않고
혼잣말로 불평을 계속하다가
다른 손님이 들어오면 그 손님에게 우리 세탁소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았다.
두어 명에게 불평을 쏟아 놓더니
제풀에 지쳤는지 드디어 세탁소를 떠났다.
그리고 잊지 않고 "다시는 이 세탁소에 오나 봐라."라며
예전의 형식을 반복했다.
나는 확신한다.
2 주 후면 어김없이 그녀는 세탁소에 나타날 것이고
나는 또 알랑방귀를 뀌며 그녀의 비위를 맞추려고 애를 쓸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불평을 늘어놓을 상대가 주변에 없기 때문이다.
우울한 기분이 지속되면
치매에 걸리기 쉽다고 한다.
처음엔 진상 손님이라고 여기고 나도 화를 내며 대들었지만
이제는 귀여운(?) 나의 친구가 되었다.
그녀는 진상과 치매 그 사이에서
방황을 하고 있다.
불평이라도 들어줄 그 누군가가 있다면
그녀가 치매로 발전하는 속도를 늦출 수 있을 것이다.
나 또한 치매와 진상 그 어디에서 방황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누가 알겠는가.
나의 치매가 발전되었을 때
누군가 나의 이야기를 잘 들어줄는지.
크리스티나 할머니가 다시 세탁소에 나타나면
나는 어제 일은 깡그리 잊어버린 치매 환자가 되어
미소와 칭찬으로 그녀를 맞을 것이다.
크리스티나 할머니에게도 행복했던 순간이 있었을까?
지난 토요일 DUMBO에서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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